중동태의 세계-의지와 책임의 고고학
고쿠분 고이치로 지음, 박성관 옮김/동아시아·2만3000원

수업시간에 졸고 있는 학생이 있다. 교사가 학생을 혼내기 위해 교무실로 불렀다. 그런데 그 학생의 사연이 기구했다. “부모님이 교통사고로 갑자기 돌아가셔서, 동생들을 위해 매일 밤늦게까지 아르바이트를 하느라 잠을 제대로 못 잡니다.” 이런 이야기를 들은 교사라면 혼내려는 마음은 접고 어떻게든 학생을 도울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거나, 따뜻한 위로의 말을 건낼 것이다.

우리는 삶 속에서 어떤 행위의 책임을 행위자에게 전적으로 돌리기 어려운 상황들을 수없이 맞닥뜨린다. 경제 불황으로 인한 실직으로 알코올 중독자가 된 것은 술을 마신 그 사람의 잘못인가 아니면 사회 탓인가. 어떤 행위를 한 책임이 행위자에게 있는가 아니면, 행위자는 어쩔 수 없이 그런 행위를 했을 뿐인가.

<중동태의 세계>의 저자 고쿠분 고이치로. 동아시아 제공
<중동태의 세계>의 저자 고쿠분 고이치로. 동아시아 제공
일본의 철학자 고쿠분 고이치로(45)의 <중동태의 세계>는 이런 능동과 수동의 언어로 포착되지 않는 세계를 ‘중동태’라는 개념적 렌즈를 통해 새롭게 드러내려고 시도하는 저서다. 다카사키 경제대학교 교수인 고쿠분은 <고쿠분 고이치로의 들뢰즈 제대로 읽기>, <인간은 언제부터 지루해했을까?> 등으로 한국에도 조금씩 알려지기 시작한 학자다. <중동태의 세계>라는 언어학, 철학, 의학이 혼종된 독특한 장르의 이 책은 고바야시 히데오상을 수상하고 여러 서평이 발표되는 등 호평을 얻고 있다. 특히 이 책이 관련 분야에 대한 전문적 지식이 없는 일반인들도 무난히 읽어나갈 수 있도록 쓴 대중철학서라는 점에서 흥미를 더한다.

책의 전반부는 잃어버린 중동태의 정의를 찾아나서는 언어학자의 고고학적 작업과 흡사하다. 그동안 중동태에 관해서 통상적으로는 ‘능동태와 수동태의 중간’에 해당하는 태(voice) 정도로만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고쿠분은 프랑스 언어학자 에밀 벤베니스트의 논의에 따라, 애초에 대립했던 것은 능동태와 수동태가 아니라 능동태와 중동태였다고 말한다. 오히려 수동태는 중동태에서 파생되어 나왔다는 것이다. 하지만 고대의 어느 시점에서 중동태는 수동태에게 밀려났고, 담당하던 의미는 자동사, 재귀 표현, 사동 표현 등으로 분할되어 상속되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인 추론이라고 본다.

그는 중동태가 흔적을 남기고 있는 사례로 영어에서 ‘let’과 ‘blame’을 든다. let은 ‘빌려주다’라는 의미의 타동사이기 때문에 ‘남에 의해 임대될 집’을 의미하기 위해서는 ‘house to be let’이라고 해야 맞지만 실제론 ‘house to let’이라고 표현된다. blame도 ‘비난하다’라는 의미의 타동사이기 때문에 ‘비난받아야 할 사람은 나다’라고 하려면 ‘I am to be blamed’가 맞다. 하지만 실제론 ‘I am to blame’이라고 사용한다. 이 두 동사들은 분명히 타동사이지만, 어떤 변형도 없이 그 자체로 수동태 혹은 자동사처럼 사용된다. 현대 영문법에선 이런 표현들을 설명하지 못해 ‘관용적 용법’이라는 애매한 말로 처리하지만, 고쿠분은 이런 표현들은 고대 이래 억압되었던 중동태가 현대에 회귀한 것이라고 본다.

고쿠분은 능동과 수동의 대립에서는 하느냐 당하느냐가 문제가 되지만, 능동과 중동의 대립에서는 주어가 과정의 바깥의 있느냐 안에 있느냐가 문제가 된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그는 말에서 줄을 푼다’는 그리스어 문장이 있다고 하자. 중동태를 사용한 문장일 경우, 이 문장은 필연적으로 ‘그 자신이 말에 탈 것’이라는 점을 함의한다. 이는 말이 줄에서 풀려남으로써 개시된 그 과정의 내부에 주어가 위치 지어져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능동태를 사용한 경우는, 그 과정이 주어의 밖에서 완수됨을 함의하며, ‘풀려난 말을 주어가 아닌 다른 사람이 타는 상황’을 의미하게 된다. 이런 사정을 반영해 벤베니스트가 중동태를 ‘내태’로, 능동태를 ‘외태’로 부르자고 제안하기도 하나, 고쿠분은 오해의 역사를 잊지 않고 되풀이 하지 않기 위해 그 이름을 남겨두자고 말한다.

중동태의 정의를 얻어낸 고쿠분은 현실의 문제로 돌아오는 대신, 철학사를 중동태적으로 읽어내는데 집중한다. 한나 아렌트가 <정신의 삶>에서 논의한 폭력과 권력의 구분, 하이데거의 의지론, 들뢰즈의 동적 발생이론만이 아니라 허먼 멜빌의 단편소설 <빌리 버드> 같은 문학작품을 통해서 행위, 의지, 책임 같은 개념들을 재검토하는 것이다. 재판정의 판결이나 정신의학적 치료와 같은 현실의 문제들의 결론이 수동과 능동의 논리에서 벗어난 중동태를 통해봤을 때 어떻게 달라질지 궁금해했던 독자들은 아쉬움을 느낄 수 있겠다. 고쿠분의 바람대로, 이 책이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을 자극해 철학 이외의 분야에서도 중동태적 논의를 활발히 하는 마중물이 되기를 기대해본다.

김지훈 기자 watchdog@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