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 아렌트 ‘사유’ ‘의지’ 합본 출간
“진리와 지식은 의미와 사유에 대립”
사유·의지·판단 등 세 정신활동 고찰
“판단의 모태는 공통감각·공동체감각”
정신의 삶-사유와 의지
한나 아렌트 지음, 홍원표 옮김/푸른숲·3만9800원

얼마 전 대학 교양교육 교재에 실린 한나 아렌트(1906~1975)의 ‘악의 평범성’이라는 텍스트에서 예루살렘 법정에 섰던 전범 아이히만의 ‘사유 무능’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를 두고 동료 교수와 심각하게 의견을 교환한 적이 있다. 그의 논점은 아렌트의 아이히만 분석이 틀렸다는 것이었다. ‘예루살렘 이전의 아이히만’은 단순히 판단력이 마비된 충직한 관료가 아니라 유대인을 철저히 독일의 적으로 간주하고 유대인의 절멸을 지지한 신념에 찬 나치였다는 것이다. 최근 연구결과에 의하면, 아이히만에게 분명 평범하지는 않은 측면이 있어 보인다. 그렇다면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 테제는 그 시효를 다한 것이고 ‘사유 무능’의 진단 역시 작위적이라서 폐기해야 하는 것인가?

한나 아렌트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나치 전범인 아이히만의 ‘사유 무능’을 지적하고 난 이후 인간의 정신활동을 철학적으로 해명하려 했다. 그 결과물이 <정신의 삶>이다. 푸른숲 제공
한나 아렌트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나치 전범인 아이히만의 ‘사유 무능’을 지적하고 난 이후 인간의 정신활동을 철학적으로 해명하려 했다. 그 결과물이 <정신의 삶>이다. 푸른숲 제공
사실 이 문제에 답하기 위해서 아렌트는 아이히만의 재판을 참관하고 나자마자 정신활동에 본격적인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1960년대 초반부터 1975년 심장마비로 갑자기 숨지기 직전까지 발전시켜온 본격적인 철학서가 최근 우리말로 출간된 <정신의 삶>이다. 이 저작은 1977년과 1978년도에 각각 단행본으로 출간된 <사유>와 <의지>를 합본했다. 책의 형태로 저술하지 못한 <판단> 부분은 아렌트의 칸트 정치철학 강의록을 발췌해 부록으로 실었다.

아렌트의 면밀한 관찰에 따르면, 아이히만의 인성에는 특정한 악의 동기나 이데올로기적 확신에 대한 어떤 징후도 보이지 않았다. 유일하게 주목할 만한 특징은 ‘무사유’(thoughtlessness)였다. 우리가 공적인 영역에서 행위하는 방식은 궁극적으로 우리가 사유하는 방식에 의거한다는 점에서 아렌트는 우리 시대에 범해진 가장 끔찍한 악의 뿌리가 바로 무사유라고 확신한다.

일반적으로 어떤 사유에는 특정한 목적이 있을 수 없다. 하지만 우리가 자신의 목표에서 실수로 벗어나게 될 때 그 실수의 근원은 ‘무지’가 아니라 ‘사유의 부재’에 있다. 무지가 지식을 부정하는 것이라면, 무사유는 의미를 부정하는 것이다.

우리는 ‘정신의 삶’에 대한 분석에서 아렌트가 문제 삼는 새로운 역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정치적 행위는 한국의 정치행태에서 당연시되는 지식의 문제가 아니다. 정치란 공적인 영역에서 시민에게 합리적으로 확신을 심어주려는 설득의 과정이자 신념의 사안인 것이다. 인간의 악행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지식에 대한 갈증이 아닌 의미의 갈구이다. 다시 말해서, 사유와 지식은 별개의 사안이다. 사유가 의미, 나아가 합리적 신념에 관여한다면 지식은 진리에 관여하기 때문이다. 진리는 늘 압도적이라서 우리는 거기에 순응해야 한다. 자기 자각이라는 의미의 의식이 없다면 사유는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의미의 영역은 진리의 영역과 달리 압도적일 수는 없다. 이처럼 진리와 지식은 의미와 사유에 대립된다.

한나 아렌트. 푸른숲 제공
한나 아렌트. 푸른숲 제공
아렌트는 칸트처럼 <정신의 삶>에서 인간의 사유, 의지, 판단을 세 가지 기본적인 정신활동으로 이해한다. 일찍이 칸트는 세 비판서인 <순수이성비판>, <실천이성비판>, <판단력비판>을 통해 사유, 의지, 판단을 다루었다. 칸트가 이 세 기본활동을 초월론적으로 접근한 데 반해서 아렌트는 이의 역사적인 측면들을 규명하고자 했다. 다시 말해 아렌트는 고대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어떻게 정신활동을 통해 철학자들이 세계 내에 안주하는 것으로부터 벗어나려 했는지를 보여주고자 했다. 여기에 근원적인 역설이 존재한다. 그 역설은 아렌트가 “현상의 세계로부터 물러날 채비를 갖춘 인간의 정신이 안주할 수 있거나 여태 그래야만 한다고 했던 세계를 믿지 않는다. 그 세계가 과거 세계이든 미래 세계이든 이를 믿지 않는다”라고 한 데서 기인한다. 정신적 삶의 기본특성이 세계로부터 물러날 때에야 나타남에도 인간의 마음은 그 어디에도 물러나 있을 장소가 없다는 것이 문제였다.

아렌트는 정신의 삶에서 사유, 의지, 판단이라는 세 정신활동이 자립적이라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세 정신활동 사이에 공통점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어떤 공통분모로 환원될 수는 없다는 점에서 확실히 자율적이다. 먼저 사유, 의지, 판단을 시간적으로 살펴보자. 세 정신활동 가운데 사유는 나 자신을 현재에 던지는 것(object)인 반면에, 의지는 자신을 미래에 던지는 것(project)이라 할 수 있다. 판단은 스스로 과거를 돌이켜 본다는 점(retrospect)에서 확실히 구별된다.

아렌트는 관조가 인간의 사유를 촉발하지 않는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 사유의 선결조건은 “이성의 필요성”이다. 바꾸어 말하면, 사유는 성찰 가운데에서 자신을 현실화할 수 있는 능력의 내적 충동에 의해 촉발되는 것이다. 사유 이후에 나타나는 것이 양심이다. 양심은 칸트의 실천이성이 되기 전에 신의 목소리였다.

의지능력은 자유문제와 관련이 있다. 특히 아렌트가 중시하는 정치적 자유는 ‘나는 의지한다’가 아니라 ‘나는 할 수 있다’는 특성이라는 점에서 철학적 자유와 다르다. 정치적 자유는 인간일반이라기보다는 시민이 지니고 있기에, 함께 살 수 있는 다수가 법·관습·습관 등에 의해 규제되는 행위로 교류하는 공동체에만 존재한다. 의지 이외의 그 어떤 것도 의지의 온전한 동인이 되지 못한다는 점에서는 사유와 판단으로부터 독립적이다.

판단은 발견의 관점에서 우리의 정신능력들 가운데 가장 늦게 밝혀졌다. 칸트의 입장을 적극 수용하는 아렌트는 아름다움을 식별할 수 있는 취미야말로 “우리가 특수한 것들을 대면할 때 항상 작용하는 능력”이라고 본다. 여기서 취미는 나의 오감을 종합하는 데 필요한 일종의 제6감이다. 이는 곧 공통감각 또는 공동체 감각에 기반을 두고 있다.

그렇다면 취미판단의 타당성은 어디에서 기인하는가? 아렌트는 그 타당성을 “객관적이거나 보편적이지 않고 개인의 변덕에 좌우되는 주관적인 것이 아니라, 상호주관적이거나 재연적인 것”에서 찾는다. 이처럼 판단의 모태가 공동체 성원이라는 점을 통해 얻어지는 감각이라면 우리는 타인의 판단들을 환기하고 암묵적으로 평가하지 않고서는 판단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이는 타인들의 존재를 배려하는 것이며, 타인들의 동의를 얻고 승인을 요구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우리가 취미판단에 이르렀을 때 세계의 ‘좋은 부분’과 불화할 수는 있어도 ‘세계 전체’와 불화할 수는 없는 일이다. 칸트와 아렌트가 “취미 내에서 자아주의(egoism)가 극복된다”라고 주장한 것은 옳다.

신충식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신충식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아렌트는 촛불혁명 이후 가장 주목을 받고 있는 서구 사상가이다. 그의 저서들 가운데 가장 많은 호기심을 자극하고, 가장 진지하게 우리의 사유, 의지, 판단을 새롭게 정립한 <정신의 삶>을 우리의 언어로 읽을 수 있게 되었다. 지난 30여년간 치열하게 아렌트 사상을 소개해오다 정년에 이른 번역자 홍원표 교수의 노고에 경의를 표한다.

신충식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