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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를 사로잡는 첫 문장의 비밀
글쓴이 : 최고관리자 날짜 : 2021-11-11 (목) 12:00 조회 : 160
최재봉의 탐문 _04 첫 문장
문장은 자아의 표현이요 세계의 의미화다. 문장은 그것을 쓴 사람을 드러내고 그것이 쓰이고 읽히는 사회를 비춘다. 문학을 문학으로 만드는 데에 문장은 결정적인 구실을 한다. 문장이 곧 문학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니 누군들 이렇듯 강렬하고 인상적인 문장을 구사하고 싶지 않겠는가.

어떤 소설들은 강렬한 첫 문장으로 오래도록 기억된다.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를 아시오? 나는 유쾌하오. 이런 때 연애까지가 유쾌하오.”

“사람이 비밀이 없다는 것은 재산 없는 것처럼 가난하고 허전한 일이다.”

이상의 두 단편 ‘날개’와 ‘실화’의 첫 문장들은 소설의 주제와 성격을 인상적으로 제시한다. 이런 첫 문장을 만나는 순간, 독자는 소설 속 상황과 인물 속으로 속절없이 빨려 들어갈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이상은 독자의 주의를 단번에 사로잡는 요령을 아는 작가였다.

한 번 접하면 좀처럼 잊을 수 없는 첫 문장의 사례들을 살펴보자.

“그에게서는 언제나 비누 냄새가 난다.”

전후의 폐허와 남루를 채 벗어던지지 못한 1960년 1월, <사상계>에 발표된 강신재의 단편 ‘젊은 느티나무’의 첫 문장이다. 60여년 전의 비누 냄새가 지금과는 다르다는 사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상상력을 발휘해야 한다. 탄흔과 포연이 곳곳에 남아 있고 총성과 비명의 기억이 여전히 생생한 터에 대뜸 ‘비누 냄새’를 앞세우는 감각이란 얼마나 낯설고 신선했을 것인가. 비록 사회 전체의 음울한 현실에서 동떨어진 ‘유한계급’의 사랑 놀음이라 트집 잡을 수 있을지는 몰라도, 비누 냄새라는 후각 안에는 60년대의 새로움과 역동성을 추동한 씨앗이 내장되어 있었다.

“공문(空門)의 안뜰에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바깥뜰에 있는 것도 아니어서”로 시작해 “우계에는 안개비나 조금 오다 그친다는 남녘 유리(羑里)로도 모인다”로 끝나는 박상륭 소설 <죽음의 한 연구> 첫 문장은 원고지로 두 장을 꼬박 채울 정도로 길고 복잡한 구조로도 유명하다. 일곱 개의 쉼표를 거쳐 마침내(!) 마침표를 찍을 때까지 산천경개를 유람하듯 구불구불 이어지는 이 문장이 “어떤 것들은”이라는 주어와 “모인다”라는 술어로 깔끔하게 추려진다는 사실은 일찍이 평론가 김현이 감탄을 섞어 적시했던 바였다.

“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

김훈의 대표작 <칼의 노래> 첫 문장은 주어의 조사를 “은”으로 할지 “이”로 할지를 놓고 작가가 고민했다는 일화로도 잘 알려져 있다. 같은 조사라고는 해도 ‘이’와 ‘은’은 사뭇 다르다. ‘이’가 객관적 사실의 건조한 진술이라면 ‘은’에는 서술자의 주관이 들어가 있는 것이다. 전쟁으로 주민들이 떠난 섬에 꽃이 피어 있다는 동일한 사실을 서술하는 것이지만, 보조사 ‘은’을 쓰는 순간 그런 상황을 대하는 서술자의 안타까운 심정이 개입되게 된다. <칼의 노래>는 전반적으로 담담하고 냉정한 서술을 통해 오로지 ‘바다의 사실’에 충실할 뿐인 이순신의 개성을 드러낸다는 서사 전략을 지닌 작품이기 때문에, 첫 문장의 조사를 ‘은’이 아닌 ‘이’로 택한 것은 절묘한 결정이었다.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 신호소에 기차가 멈춰 섰다.”

가와바타 야스나리 소설 <설국>의 도입부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니가타현의 온천 마을로 이끌었던가!

“4월, 맑고 쌀쌀한 날이었다. 괘종시계가 13시를 알렸다.”

“어느 날 아침 그레고르 잠자가 불안한 꿈에서 깨어났을 때, 그는 자신이 침대 속에서 한 마리의 커다란 해충으로 변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조지 오웰의 소설 <1984>와 카프카의 단편 ‘변신’의 첫 문장은 현실에 있을 법하지 않은 상황 설정으로 아연 긴장과 충격을 조성한다. 괘종시계의 종소리가 ‘12’라는 암묵적 한계를 넘어 13을 알릴 때, 독자는 무언가 자신이 알고 있는 현실과는 다른 세계가 펼쳐질 것임을 예상하며 마음을 졸이게 된다. 잠든 사이에 돌연 벌레로 변해 버린 자신을 발견한 인간의 놀라움은 얼마나 클 것인가. 벌레로 변한 그를 가족들은 어떻게 대할까. 과연 그는 다시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오게 될까. 이런 소설들은 첫 문장만으로도 많은 이야기를 전해 준다. 과장하자면 첫 문장에 이어지는 나머지 문장들이란 그에 대한 부연설명이라고 할 수도 있을 정도다.

“재산깨나 있는 독신 남자에게 아내가 꼭 필요하리라는 것은 누구나 인정하는 진리다.”(제인 오스틴, <오만과 편견>)

“행복한 가정은 모두 고만고만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저마다 나름나름으로 불행하다.”(레프 톨스토이, <안나 카레니나>)

이 두 소설의 첫 문장은, 비록 시대적 한계와 편견에서 자유롭지 않을지언정, 세속적 진리를 담은 일종의 금언으로 널리 회자된다. 이 밖에도 기억할 만한 첫 문장들의 사례는 무수히 많지만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것은 찰스 디킨스의 시적인 대비가 인상적인 소설 <두 도시 이야기> 도입부다.

“최고의 시간이었고, 최악의 시간이었다. 지혜의 시대였고, 어리석음의 시대였다. 믿음의 세기였고, 불신의 세기였다. 빛의 계절이었고, 어둠의 계절이었다. 희망의 봄이었고, 절망의 겨울이었다. 우리 앞에 모든 것이 있었고, 우리 앞에 아무것도 없었다.”

이 소설의 배경은 물론 프랑스혁명 무렵이라는 특정한 시간대이지만, 당대의 양면성을 포착한 디킨스의 문장은 2021년 현재를 포함해 거의 모든 시간대에 두루 해당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첫 문장만큼은 아닐지 몰라도 어떤 소설의 마지막 문장은 책을 덮고 난 뒤에도 진한 여운을 남기며 머릿속에 맴돌고는 한다.

“그래서 우리는 계속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흐름을 거슬러가는 조각배처럼, 끊임없이 과거로 떠밀려가면서도.”

피츠제럴드의 소설 <위대한 개츠비>의 결말은 주인공 개츠비의 이른 죽음을 애도하는 가운데, 부질없는 것을 추구하는 행위의 숭고함과 그런 숭고함을 짓밟고 파괴하며 전진할 수밖에 없는 세속 도시의 잔인한 슬픔을 시적인 문장에 담아 전한다.

“‘꼭 내일이 아니라도 좋다.’ 그는 혼자서 다짐했다.”(황석영, ‘객지’)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뜰 테니까.”(마거릿 미첼,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두 소설의 마지막 장면에서 ‘내일’이라는 미래의 시간대는 나란히 희망의 약속을 품고 있다. ‘객지’의 주인공인 파업 노동자 동혁은 좌절한 거사의 재개를 ‘열린 내일’이라는 막연한 미래에 의탁한다. 미첼의 소설에서도 주인공 스칼릿이 내뱉는 혼잣말은 쓰라린 낙관과 체념 섞인 의지를 절묘하게 버무린다. 스칼릿의 독백 원문은 ‘After all, tomorrow is another day’로, 직역하면 ‘어쨌든 내일은 또 다른 날이니까’ 정도가 될 것이다. 이 말 자체도 미국에서는 일상 회화에서 관용적으로 쓰일 정도로 사랑받고 있다지만, 한국어 독자들에게는 아무래도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뜰 테니까’라는 의역이 한결 친숙한데다 작품의 주제와도 더 잘 연결되는 느낌이다. 헤밍웨이의 소설 제목 ‘태양은 또다시 떠오른다’(The Sun Also Rises)를 닮은 이 번역문은 작고한 영문학자 장왕록의 고안으로 알려져 있는데, 창조적 의역의 대표적 사례라 하겠다(말이 나온 김에, 지면 사정상 이 글에서 일일이 이름을 밝히지 못한 번역자들에게 새삼 고마운 마음을 전한다).

문장은 자아의 표현이요 세계의 의미화다. 문장은 그것을 쓴 사람을 드러내고 그것이 쓰이고 읽히는 사회를 비춘다. 문학을 문학으로 만드는 데에 문장은 결정적인 구실을 한다. 문장이 곧 문학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니 누군들 이렇듯 강렬하고 인상적인 문장을 구사하고 싶지 않겠는가. 세상에는 문장 안내서도 차고 넘친다. 그 책들의 조언이 두루 쓸모가 있겠지만, 여기에서는 영국 작가 제이디 스미스의 에세이 한 대목을 참고삼아 소개하고자 한다.

“나는 첫 문장을 쓰는 것으로 소설을 시작하고 마지막 문장으로 소설을 끝낸다.”

하나 마나 한 소리, 허무 개그라는 원성이 들려오는 듯하다. 작가는 정말 실없는 농담을 한 것일까. 그럴 리가 있겠는가. 소설에 대한 장악력과 자신감, 과단성이 필요하다는 뜻으로 저 말을 새기고자 한다. 어떤 소설을 어떻게 쓸지 판단이 서고 준비가 끝나면 과감하게 첫 문장을 적으라는 것, 그리고 쓰고자 하는 소설을 다 썼다면 역시 미련 없이 마지막 문장을 쓰고 마침표를 찍으라는 것이 스미스의 조언 아니겠는가. 또한, 이 말을 어찌 굳이 소설에만 국한하겠는가. 그것은 보고서와 기사를 포함해 모든 종류의 글에 두루 해당하는 금언이 아닐지. 시작이 반이다. 첫 문장에서 시작하자.

최재봉ㅣ책지성팀 선임기자. 1988년에 한겨레에 들어와 1992년부터 30년째 문학 담당 기자로 일하고 있다. 작가들과 독자들 사이의 가교 역할에 충실하며, 문학의 본질과 변화 사이에서 균형을 잡고자 한다. 지은 책으로 <역사와 만나는 문학기행> <거울 나라의 작가들> <그 작가, 그 공간> 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 <에드거 스노 자서전> <악평> <제목은 뭐로 하지?> 등이 있다.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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