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1987>의 한 장면
영화 <1987>의 한 장면

대학이 수상하다. 해방 이후 줄곧 진보의 보루였던 대학이 보수의 아성으로 변해가고 있다. 논쟁적이고 혁명적인 담론을 풀어놓던 교수는 깔끔하고 표준화된 논문의 생산자로 순치되었고, 사회 변혁의 아방가르드였던 학생은 ‘소확행’을 꿈꾸는 착실한 모범생으로 변신했다. 아무도 이상사회를 몽상하지 않으며, 누구도 새로운 삶을 실험하지 않는다. 가히 네오비더마이어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냉정하게 돌아보면 그리 놀랄 일도 아니다. 대학의 보수화는 이미 짧지 않은 역사를 갖고 있다. 역설적이게도, 한국 대학은 정치 민주화가 쟁취된 바로 그 순간부터 보수화되기 시작했다. 1987년 6·10항쟁으로 민주화 시대가 열린 이후 새로 등장한 직선 총장들이 ‘경영총장’이었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군사독재 시대의 ‘어용 정치총장’이 물러난 자리를 ‘실용 경영총장’이 차지한 것이다. 이는 ‘민주화’의 본질이 기실 군사독재에서 자본독재로의 이행에 불과함을 서늘하게 암시한다.

한국 민주주의의 견인차였던 대학이 보수화되는 현상은 경영총장의 등장과 함께, 즉 대학의 기업화와 더불어 시작되었다. 이제 대학은 진리의 전당이 아니라 취업학원이 되었고, ‘자유롭고 평등한 학문 공동체’가 아니라 생존 경쟁의 새로운 전쟁터로 바뀌었다. 대학 캠퍼스엔 현란한 상업시설들이 들어섰고, 대학 게시판은 뜨거운 변혁의 대자보 대신 싸늘한 기업 홍보물로 도배되었다. 군사독재 시절 유일한 정치적 공론장이었던 아크로폴리스는 자본독재의 전시장으로 변신했다. 대학은 심각한 정치적 사건이 터져도 대자보 하나 붙지 않는 정치의 무풍지대, 이념의 불모지대로 변했고, 진리를 탐구하고 정의를 갈구하는 학생은 희귀종이 되었다.

대학 보수화의 가장 중요한 원인은 대학의 기업화에 있다. 헨리 지루는 대학 기업화가 어떻게 대학을 보수화했는지를 탁월하게 짚어낸다. 그에 따르면 1990년대 초 동구 사회주의가 붕괴하고 냉전 체제가 해체된 이후 “사회주의에 대한 승리의 이데올로기적 상속인”으로서 기업적 문화가 민주적 문화를 대체했고, 기업적 문화가 창궐하는 가운데 대학의 기업화가 가속화되었다. 요컨대 대학 기업화는 시장과 대학 사이에서 벌어지는 ‘문화전쟁’의 과정에서 시장이 대학에 대해, 보수가 진보를 향해 가하는 이데올로기적 공세에 다름 아니라는 것이다.

대학 기업화에 의해 초래된 대학 보수화의 현실적 모습은 무엇보다도 인문학과 사회과학에 대한 대대적인 공세로 나타났다. 특히 한국에서 인문사회과학은 ‘취업이 학문에 우선한다’는 천박한 취업대학론이 지배적인 담론이 되면서 직격탄을 맞았고, ‘민주개혁 정부’하에서조차 전체 연구개발 예산의 1.5%를 할당받는 등 거의 ‘학대’ 수준의 대우를 받고 있다. 이렇게 ‘비판학문’이 경시되면서 민주혁명의 성지였던 대학은 급격히 보수화하고 있다.

대학의 보수화에는 민주개혁 정부의 무지와 무소신도 한몫했다. 김대중, 노무현 정부는 대학 기업화의 정치적 함의를 통찰하지 못한 채 그에 동조함으로써 대학 보수화에 일조했다. 대학이 성숙한 민주시민을 양성하는 최고 교육기관이 되어야 하며, ‘민주주의학’으로서 인문학과 사회과학을 중시해야 한다는 인식보다는 ‘대학도 산업’(노무현)이라는 관점이 우위를 점했다. 이것이 지난 30년간 한국 대학이 아무런 저항 없이, 소리 소문도 없이 보수화의 길을 걸어올 수 있었던 내력이다.

문재인 정부도 그리 다르지 않다. 대학 정책, 학문 정책에 어떤 새로운 비전도, 구체적 계획도, 거시적 안목도 보이지 않는다. ‘취업대학론’의 보수적 시야에서 벗어나 ‘민주대학론’의 진보적 관점을 취하는 것이 최우선 과제다.

젊은 세대의 보수화는 대학 보수화의 반영이며, 대학 보수화는 대학 기업화의 결과이다. 문재인 정부는 더 이상 대학의 보수화에 눈감아서는 안 된다. 적극적인 대학 정책과 학문 정책을 통해 사회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고 민주주의를 질적으로 성숙시킬 지적 토대를 다져야 한다. 대학/학문 정책을 오로지 경제적 관점에서 접근하는 근시안적 태도에서 벗어나야 한다. 최근 출범한 국가교육위원회에 상응하는 규모의 ‘국가학문위원회’를 신설하여 획기적인 대학 개혁을 추진하고 장기적인 학문 정책을 마련해야 한다.

대학이 이상사회를 꿈꾸지 않고, 대학생이 소확행에 빠져드는 사회에 미래는 없다.

김누리
중앙대 교수·독문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