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일야방성대곡’을 떠올리면서, ‘그때 나라가 왜 그 지경까지 되었는가’ 하고 자문해 본다. 그 이유를 일제의 침략과는 별도로 고종의 통치 역량에서 찾을 수는 없을까. 고종은 민력을 국가동력으로 활용하지 않았다.

지난 17일은 ‘을사늑약’으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이 강탈당한 지 114년이 되는 날이다. 1905년 11월20일 <황성신문>은 논설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 放聲大哭)을 5조약 ‘체결’의 전말과 함께 발표했다. 며칠 뒤에는 <대한매일신보>도 영문(英文)과 함께 그 내용을 전재했다. 국한문 500여자로 된 이 논설은 내한한 이토 히로부미에 대한 기대와 실망으로 시작한다. 황제의 강경한 거절과는 달리 ‘개돼지’만도 못한 대신들은 2천만을 노예로 만들었고, 4천년 강토와 500년 사직을 넘겼다고 하면서, 김상헌(金尙憲)이나 정온(鄭蘊)처럼 행동하지 않았다고 질타했다. 뒤이어 2천만 동포를 향해 통분을 호소한다.

‘시일야 방성대곡’을 떠올리는 것은 1905년 11월 일제가 미·영 등의 도움을 받아 ‘을사늑약’을 강요했던 때처럼 최근에도 지소미아(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 등으로 비슷한 압박을 받고 있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지소미아 문제는 일본의 수출제재가 원인이라는 주장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일본과 한통속이 된 듯 한국 쪽 주장을 무시한다. 그런 상황에서 주변국의 횡포에 맞서는 당국과는 달리 국내 언론은 정치인 지식인의 동맹 걱정이나 전하며 호들갑을 떨고 비아냥거린다.

당시 ‘늑약 체결’은 영·미를 제쳐놓고 말할 수 없다. 삼국간섭으로 등장한 러시아는 만주와 한반도 문제로 일본과 부딪쳤고, 러일전쟁에서 일본은 승기를 잡았다. 영·미는 러일전쟁에서 일본을 도왔다. 발트함대가 아프리카 남단을 우회한 것도 1902년 체결한 영일동맹 덕분이다. 미국 또한 일본에 우호적이어서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일본이 극동에서 자기들을 위해 싸우고 있다고 노골적으로 두둔했다. 1905년 7월 교환된 가쓰라-태프트 밀약은 한국을 장악하려는 일본의 시도에 미국이 자기 입장을 드러낸 것이다.

러일전쟁 중 1905년 4월 일본은 ‘한국에 대한 자유행동권’ 등을 조건으로 루스벨트에게 러시아와의 중재를 요청했다. 그해 5월 말, 발트함대가 붕괴되자 러시아도 루스벨트의 휴전 중재제안을 받아들였다. 포츠머스 강화회담이 진행되는 8월 일본은 영국과 제2차 영일공수동맹을 체결해 입지를 강화했다. 9월5일 조인된 포츠머스 조약은 한국에 대한 일본의 정치·군사·경제적 권익을 인정했다. 일본은 이렇게 영·미·러로부터 한국에 대한 제반 권리를 인정받은 뒤 ‘을사늑약’을 밀어붙였다.

일제는 1905년 10월27일 각료회의에서 한국 보호권 확립을 위한 8개 항을 만들어 11월에 이를 실행하기로 결정했다. 11월 초순 일왕의 친서를 가지고 내한한 이토는 10일과 15일에 고종을 알현해, 조약안을 제시하면서 수락을 요구했다. 16일 아침 일본공사 하야시 곤스케는 외부대신 박제순을 공사관으로 초치해 조약 원안을 제시하고 강요했다. 이토도 이날 오후 각 대신을 그의 숙소로 ‘납치’하여 밤늦게까지 조약 체결을 요구했으나, 17일 수옥헌(漱玉軒: 지금 重明殿)에서 열린 군신회의는 수락 불가를 결정했다. 이토는 이날 저녁 한국 대신들을 다시 불러모아 체결을 강박했다. 일본군 사령관 하세가와 요시미치가 거느린 군대가 회담장을 몇겹으로 둘러싸고 서울의 각 요소에는 야포 기관총까지 배치한 공포 분위기였다. 이토는 8대신들에게 일일이 물어 자기 뜻대로 가부를 해석해, 다섯 대신(이완용·이근택·이지용·박제순·권중현)의 동의를 얻었다는 핑계로 외교권을 강탈했다. 신뢰를 문제 삼아 경제제재를 가하는 일본은 네번이나 수상을 지낸 이토가 한국 황실에서 행한 이 만행을 어떻게 기억하는지, 거기에다 그 10년 전에는 조선왕실을 침범하여 민비를 시해하고 불태우기까지 한 만행을 기억이나 하는지.

‘시일야방성대곡’은 통분하는 백성에게 궐기를 호소하고 있다. 이를 게재한 <황성신문>은 무기정간 당했고, 황성신문 사장 장지연은 그 이듬해 1월에 안병찬 등과 함께 석방됐다. 원로대신 조병세 민영환 심상훈 등의 반대상소에 이어 각계의 상소가 줄을 이었으나, 조병세 민영환 홍만식 송병선 이상철 김봉학 등은 곧 자결했다. 상가는 철시했고, 학교는 동맹휴학에 들어갔다. 대한문 앞에서는 이준이 소두(疏頭)가 되어 상소를 올렸고, 전덕기 등은 을사오적을 처단하려 했으며, 곳곳에서 의병이 일어났다. 이때만 해도 언론은 제구실을 했다.

‘을사늑약’은 한 나라의 외교권을 이양하는 조약으로서는 허점이 많아 최근에는 그 조약의 성립 자체를 의심한다. 조약 원본에 조약명이 없어 여러 이름으로 불리는 것은 차치하고, 외교권 이양의 조약치고는 그 위격(位格)도 찾아보기 어렵다. 체결을 위임받은 한국 쪽 전권대표가 없는데다 하야시 공사나 이토가 소집한 회의는 정당성이 없다. 일제는 처음부터 이 ‘조약’의 비준을 염두에 두지 않았지만, 고종 또한 끝까지 비준을 거부했다. 강압에 의해 이뤄진 이 조약은 1935년 국제법학회가 ‘강박 아래 체결된 어떤 조약도 무효’라고 했을 때, 또 유엔 국제법위원회가 1963년 ‘국가대표에 가한 개인적 강압에 의해 체결된 조약이 무효에 해당한다’고 규정했을 때, 두 경우 모두 ‘을사늑약’은 그 대표적인 사례로 꼽혔다.

‘시일야방성대곡’을 떠올리면서, ‘그때 나라가 왜 그 지경까지 되었는가’ 하고 자문해 본다. 그 이유를 일제의 침략과는 별도로 고종의 통치 역량에서 찾을 수는 없을까. 이토가 ‘을사늑약’ 초안을 내밀었을 때, 고종은 ‘일반 인민의 의향도 살펴야 한다’고 했다. 고종은 이때 동학농민혁명 때 표출된 인민의 힘이라면 이를 거부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는 그 전에 민력을 국가동력으로 활용하지 않았다. 동학농민혁명이나 독립협회가 민권 신장을 통해 국권을 강화하려고 했을 때 고종은 의회 설립 대신 황제권 강화와 대한제국으로 답했다. 이는 인민의 역량 강화를 통해 국권을 강화하겠다는 노선과는 상반됐다. 그가 선택한 길은 지배자 하나를 흔들면 나라 전체가 흔들리는 그런 구조였다. 이런 구조를 선호한 것이 제국주의 침략세력이었다. 동학농민혁명에서 표출되고 독립협회 운동이 제시한, 민권을 토대로 의회를 설립하는 등 민주역량을 강화했더라면 그렇게 쉽게 나라가 무너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시일야방성대곡’을 상기하면서 새겨야 할 교훈이다.

‘시일야방성대곡’이 지금도 망국의 역사의식을 불러일으켜 주듯이, 동북아가 꿈틀대는 오늘날 우리의 처신도 어느 땐가 역사적 평가를 받을 것이다. 그래서 백범도 애송했던 이양연(李亮淵)의 시를 가슴에 품는다. “눈 내린 들판을 밟아 갈 적에는, 그 발걸음을 어지러이 걷지 말라. 오늘 걸어가는 나의 발자국은 뒤에 오는 사람의 이정표가 되리니.”

이만열 ┃ 상지학원 이사장·전 국사편찬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