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누리
중앙대 교수·독문학

이화여대, 강남역에 이어 광화문광장에서도 가면 시위가 벌어졌다. 한진그룹의 ‘갑질’을 성토하는 최근 시위에서는 마스크뿐만 아니라 음성변조기를 장착한 마이크까지 등장했다. 가면으로 얼굴을 가리고, 가성으로 음성을 바꾸고 시위에 나서야 하는 한국 민주주의의 현실이 조양호 일가의 갑질보다 더 끔찍하다.

본래 시위란 데몬스트레이션, 자신을 ‘드러내는’ 행위다. 그러니 자신을 ‘감추는’ 가면 시위는 시위의 부정, 반시위인 셈이다. 그럼에도, 왜 이 땅의 학생, 여성, 노동자들은 가면을 쓰고 거리에 나서는가.

가면 시위는 한국 사회가 ‘불안사회’임을 새삼 환기한다. 부동의 세계 1위 자살률이 방증하듯이, 한국인의 불안도는 세계 최고 수준이다. 불안은 한국 사회를 움직이는 심층 동인이자, 한국 사회를 관리하는 숨은 지배자다. 한국인은 너나없이 일순간 모든 것을 잃을 수 있으며, 한걸음에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다는 불안감에 사로잡혀 있다. 그러니 슬라보이 지제크가 한국에서 “동시대 최고 형태의 허무주의”를 발견하는 것도 그리 놀랄 일이 아니다.

불안을 통해 지배하는 자는 일상의 미시권력이다. 그들은 공론장의 거시권력보다 힘이 세다. ‘박근혜 시위’에서 볼 수 없었던 가면이 ‘조양호 시위’에서 등장한 것은 의미심장하다. 대통령은 내놓고 비판할 수 있어도, 사장은 그럴 수 없다. 광장의 거시권력보다 일상의 미시권력이 더 무서운 것이다. 힘겹게 쟁취한 정치민주화에도 불구하고 사회민주화는 아직도 요원한 이유다.

‘가면 쓴 민주주의’는 한국 사회의 역사적 변화에 조응하는 것이기도 하다. 군사독재 시대에서 자본독재 시대로 이행하면서 지배방식도 변했다. 군사독재가 물리적 폭력으로 생명을 위협했다면, 자본독재는 심리적 압력으로 생존을 겁박한다. 군사독재가 외적 억압과 검열로 민주주의를 억눌렀다면, 자본독재는 내적 공포와 자기검열로 민주주의의 숨통을 조른다. 그리하여 일상에 공기처럼 스며든 생존의 불안이 민주주의에 가면을 씌우는 것이다.

가면 민주주의 현상의 일차적인 원인은 점점 더 촘촘해지는 감시사회다. ‘빅 브러더’(조지 오웰)가 모든 것을 ‘보고’ 있는 완벽하게 ‘관리되는 세계’(아도르노) 속에서 개인의 불안은 극에 달한다. ‘연대 없는 사회’도 가면 민주주의를 부른 중요한 요인이다. 개인을 보호할 조직도 제도도 없는 환경에서, 개인이 모든 피해와 보복을 홀로 감당해야 하는 ‘각개전투의 정글’에서, 영웅적 개인을 기대하는 것은 망상이다.

가면 민주주의를 넘어서려면 일상의 민주주의, 곧 사회민주화를 이루어야 한다. 가정, 학교, 일터에서 사회민주화를 구현하기 위해서는 특히 두 가지가 시급하다. 노동자의 신분상 불안을 제도적으로 불식할 ‘노사공동결정제’를 도입해야 하고, 권위주의적 성격을 치유할 ‘민주시민교육’을 강화해야 한다.

가면 민주주의는 우리 사회가 불안이 지배하는 사회, 연대가 실종된 사회, 감시가 전면화된 사회임을 폭로한다. 가면은 또한 우리 자신의 거대한 무력감에 대한 자기연민이며, 우리 일상의 비민주성에 대한 자기고백이다. 이런 의미에서 가면 민주주의는 한국 민주주의의 현주소인 동시에 이를 극복하고자 하는 의지의 표현이다.

가면 민주주의는 전태일이 전형적으로 보여주었던 ‘억압받는 자의 위엄’조차 사라져 가는 시대가 도래했다는 신호이다. 인격화된 저항이 사라진 자리에 익명화된 저항이 들어선 것이다. 저항이라는 가장 인간적인 행위에서마저도 인간이 소거되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