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성
사회1 에디터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을 집행유예로 풀어준 정형식 서울고법 부장판사를 특별감사 해달라는 청와대 청원에 참여한 사람이 사흘 만에 20만명을 넘어섰다. 실제로 행정부가 사법부를 감사할 수는 없겠지만, 국민들의 분노가 얼마나 큰지 실감하게 하는 장면이다.

국민들이 이렇게 화를 내는 이유는 단순히 이재용이 미워서가 아니다. 일반인이 보기에도 명백한 사실을 재판부가 별다른 설명도 없이 너무 쉽게 무시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국민 상식을 짓밟은 최악의 판결이라는 인식이 국민들 사이에 넓게 존재하는 것이다. 이 판결의 문제점은 <한겨레> 지면에서도 지속해서 다루고 있으므로 길게 설명하지는 않겠다. 다만 이재용-박근혜 뇌물 사건의 본질이 삼성의 승계작업에 국민연금을 동원한 ‘국민재산 탈취사건’이라는 점은 분명히 해야겠다. 이건 청와대와 삼성이 공동기획하고 실제로 집행한 범죄이며, 이로 인해 정부 쪽 담당자였던 문형표 전 보건복지부 장관 등이 실형을 살고 있는 사안이다. 승계작업에 국민연금을 동원하겠다는 이재용-박근혜의 발상은 이건희의 불법상속 작업을 상대적으로 소박한 행위처럼 보이게 만들 만큼 과감하다. 이런 뻔뻔한 대국민 범죄에 대해 정형식 부장판사는 승계작업이 없었다는 한마디로 간단히 면죄부를 줬다. 특히 죽은 권력(박근혜)에 (강요)죄를 떠넘기면서 대자본(이재용)의 품에 안긴 비겁한 판결이라는 점에서 지켜보는 눈마저 부끄럽게 만든다. 더 큰 문제는 국민의 상식과 동떨어진 판결이 최근 잇따르고 있다는 점이다. 친구 사이에 오간 금품은 뇌물로 볼 수 없다는 진경준 전 검사장 뇌물 사건 판결, 부하들이 죄다 구속됐고 본인이 직접 사인한 문서까지 있는데도 김관진 전 국방부 장관의 혐의는 소명되지 않는다며 석방을 결정한 구속적부심 등 일반의 법감정에 어긋나는 판결이 줄을 잇고 있다. 법원에 의해 사회 안정성이 흔들리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다.

나는 최근 잇따르는 이상한 판결들과 양승태 전 대법원장의 인사가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는 저 유명한 ‘지록위마 판결’(원세훈 전 국가정보원장의 선거개입 혐의에 무죄를 선고한 1심 판결)을 한 이범균 부장판사를 얼마 뒤 차관급인 고법 부장판사로 승진시켰다. 이 승진인사가 말하는 바는 분명하다. 양 대법원장 6년 재임 기간 동안 이런 신호에 잘 반응한 판사들이 요직에 기용됐을 것으로 생각하는 건 무리한 상상일까.

당연한 말이지만, 사법부에 대한 불신은 누가 부추기거나 조장하는 게 아니라 사법부 스스로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양 전 대법원장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 “모든 사람을 우리 편 아니면 상대편으로 일률적으로 줄 세워 재단하는 이분법적인 사고가 만연하고, 자신의 주장만 일방적으로 강변하면서 다른 쪽의 논리는 들으려고도 하지 않는 진영논리의 병폐가 사회 곳곳을 물들이고 있습니다. (…) 이는 사법부가 당면한 큰 위기이자 재판의 독립이라는 헌법의 기본원칙에 대한 중대한 위협입니다.” 퇴임사에 나타난 그의 인식을 보면, 사법부 독립을 해치는 것은 국민들의 “이분법적인 사고”와 “진영논리의 폐해”다. 스스로 사법부 독립을 허물어 놓고 국민을 탓하는 전형적인 유체이탈 화법이다. 그는 최근 드러난 판사 사찰과, 거의 ‘청와대 출장소’ 수준으로 전락했던 법원행정처의 행태에 대해 사과는커녕 흔한 해명조차 하지 않고 있다.

지난해 우리는 선출된 권력의 부도덕함을 바로잡았다. 이제 선출되지 않은 권력이 방종하거나 부도덕해질 때 어떻게 바로잡을 것이냐는 숙제가 놓여 있다. 사법부에 대한 민주적 통제 강화 방안을 위한 토론을 시작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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