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원행정처가 작성한 비밀 문건들이 공개된 뒤 법원과 언론계 등에서 벌어지는 논란은 우리의 눈과 귀를 의심케 한다.

현직 대법관 13명은 23일 간담회를 열어 원세훈 전 국정원장 사건 재판이 “사법부 내외부의 누구로부터 어떤 연락도 받은 사실이 없음을 분명히 한다”면서 언론 보도에 대해 “의심과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것으로 깊은 우려와 유감”을 표시했다. 그런데 대법관 13명 중 6명은 재판에 관여도 안 했는데 진상을 어떻게 안다는 것인지 우선 의문이다. 당시 주심 대법관이나 대법원장 등 핵심 구실을 한 당사자들은 이미 퇴임했는데 문건 내용이 사실이 아닌지를 누구에게 확인했다는 것인지도 묻고 싶다. 대법관 회의가 동아리 모임도 아닌데 법관·재판의 독립이 걸린 헌법 위반 사안에 대법관 전체의 이름을 그렇게 함부로 내걸어도 되는가. 대법관들의 무책임한 처신에 실망을 금할 수 없다.

일부 보수 언론의 보도 역시 기본적인 언론윤리가 의심스러울 정도다. 물론 문건만으로 권력과의 뒷거래나 법관 사찰이 있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문건 내용만 봐도 실제로 실현됐을 가능성이 농후한 것 또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런데도 <조선일보> 등 보수 언론들은 일제히 ‘블랙리스트는 없었다’며 청와대와 행정처의 부적절한 거래 의혹까지 당연시했다. 법원 내부갈등 문제로 호도하고 거꾸로 대법원 추가조사에 문제가 있었던 것처럼 사건의 본말을 뒤집기도 했다.

법원행정처 정책을 비판한 판사를 선별해 명단을 만들고, 뒷조사해 기록하고, 법적 기구인 사법행정위나 판사회의 간부직에서 배제하는 게 전형적인 ‘블랙리스트’ 아닌가. 대통령의 이해관계가 걸린 사건은 법원행정처가 ‘재판부 의중을 파악’해 청와대에 보고해도 된다고 보는 것인가. 법관·재판의 독립은 물론 국민의 공정한 재판 받을 권리를 심각하게 해치는 헌법 위반 사안이 별문제 아니라고 본다면, 그게 정상적인 언론인가.

문유석 서울동부지법 부장판사는 “문건 자체보다도 우리 사회 일각의 태연자약함이 더 충격적”이라며 ‘우리 사회의 진영 논리는 이 지경에 이른 것인가’라는 글을 페이스북에 올렸다. 그러나 진영이 문제가 아니라 수구보수 일각의 편향된 시각이 문제일 뿐이다. 모든 사안을 좌우로 나누고 정파적 이해관계에 따라 판단하는 기울어진 잣대가 심각한 지경에 이른 것일 뿐이다.

김명수 대법원장이 25일 진상 규명에 미온적이던 법원행정처장을 전격 경질하며 정면돌파 의지를 드러냈다. 당시 대법원장이나 법원행정처장·차장 등 관련자들이 앞으로 컴퓨터 개방에 동의하고 진상 규명에 협조할지가 관건이다. 이미 드러난 문건만으로도 직권남용 혐의는 짙다. 김 대법원장은 전·현직 대법원장·대법관이라고 법 위에 설 수는 없다는 점을 명심하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