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현호

선임기자 겸 논설위원

“가슴이 떨려서 말을 못 하겠다.”

법원행정처가 청와대와 ‘재판 뒷거래’를 한 흔적이 발견됐다는 조사 결과에 대해 대법관 13명이 ‘사실이 아니다’라는 입장문을 낸 23일 오후, 전화를 받은 한 대법관은 시종 목소리를 높였다. “어떻게 수석 따위가 요구한다고 해서 전합(대법원 전원합의체)이 열린다는 말이냐.” 평소 차분했던 그는 격앙된 어조로 분노와 항변을 쏟아냈다.

“조사 결과를 보고 연일 잠이 잘 오지 않는다.”

격앙되기는 판사들도 마찬가지다. 법원 내부 게시판에 올라온 판사들의 글은 충격과 참담함으로 시작된다. “법원에서 나온 문건이라고는 도저히 믿기 어려운 내용”인 ‘법관 사찰’ 문건 하나하나에서 범죄 혐의를 떠올리고, 강제수사의 필요성을 말한다. “진짜 전방위적 공작정치”라는 경악과 함께 “형사처벌뿐만 아닌 판사 탄핵”도 거론한다.

놀라운 사실에 충격을 받고, 어떻게 된 일인지 진상을 따지고, 책임과 사죄를 요구하는 것은 이런 엄청난 사태에선 정상적 반응이다. 그래야 잘못을 바로잡을 수 있다. 그래서 대법관들이 해명이나 사과도 없이 대뜸 부인부터 하고 나선 것은 되레 의심과 비판을 받을 만하다. ‘재판 뒷거래’ 문건을 보고받았을 당시 대법원장이 전합 회부를 결정하고 재판을 주재했을 재판장이니, 아니라는 말로 덮을 일은 애초 아니었다.

더 참담한 것은 ‘법관 사찰’과 ‘재판 뒷거래’의 명백한 증거를 아무 일도 아닌 양 넘기려는 보수언론 등 우리 사회 일각의 태도다. 명단이 없으니 블랙리스트가 없는 것 아니냐거나, 사찰 대상 법관들이 인사 불이익을 받도록 한 증거가 없으니 범죄 구성요건이 충족되지 않는다는 식의 언급에선 지록위마, 곡학아세의 악취가 풍긴다. 큰 창고의 한 방에 가득 쌓인 도난 물품들을 발견하고도 절도 현장의 사진이 없으니 그냥 덮고 가자는 꼴이다. 네 편 내 편을 가르는 진영논리가 이제 상식과 이성을 마비시키는 지경에 이른 듯하다. 그런 악성질환이 법원까지 번졌다면 사태는 심각하다.

실은, 이번 조사 결과가 거대한 실패의 증거일 수 있다. 우리 헌법이 1987년 개헌으로 대법원장에게 법관 인사권 등 권한을 몰아준 것은, 정치권력으로부터 사법부의 독립을 지키려면 방파제가 될 대법원장의 제왕적 권한이 불가피하다는 주권자의 결단이었다. 30년이 지나, 대법원장의 보좌기구인 법원행정처가 대법원장의 정책에 반대하는 법관들을 사찰하고, 청와대와의 뒷거래를 위해 하급심 재판을 염탐하거나 대법원 재판을 동원하려 했다. 권력으로부터의 독립과 법원 내부로부터의 독립에서 모두 실패한 사건이다.

1949년 법원조직법 제정 때 사법행정을 법무부에서 분리한 것도 사법부 독립을 위한 것이었다. 2000년대 초 법원행정처는 예산 확보를 위해 국회에 현직 판사를 파견하는 등 대외창구 강화에 힘을 쏟았다. ‘궂은일’을 위한 명분으로는 법무부를 장악한 ‘검찰권력 견제’ 등이 내세워졌다. 그러다 어느새 검찰을 닮아가기 시작했다. 일선 판사들을 감시하고 재판에까지 행정처의 뜻을 관철하려 한 듯한 행정처 문건에선 법원보다 검찰의 체취가 짙다. 괴물과 맞서다 스스로 괴물이 된 것일까.

들춰진 장막을, 그것도 겨우 일부를 열었더니 어느새 곪을 대로 곪아 있었다. 없던 일로 하기엔 이미 늦었다. 어떻게든 스스로 수습하고 치울 수 있으면 좋겠지만, 도저히 그럴 수 없다면 외부의 가능한 수단을 찾는 ‘결단’도 미루지 말아야 한다. 지금은 비상한 각오가 필요한 때다. yeopo@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