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이택
논설위원

우리 사회 ‘지배세력’의 뿌리가 조선 후기 노론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는 역사학자 이덕일 박사나 돌아가신 신영복 선생의 지론은 일리가 있다. 문재인 대통령도 올해 3월에 낸 대담집 <운명에서 희망으로>에서 이 박사 글을 인용하며 공감을 표시했다. 조선말 노론은 세도정치로 나라를 망쳐놓고도 일제 때는 친일 지주세력으로 변신해 재산을 지켰다. 상당수 친일세력은 해방 뒤엔 이승만의 비호 아래 ‘반공’ 구호를 방패 삼아 다시 살아남았다. 이들이 “친일에서 독재로 옮겨갈 때 반공을 내세웠듯이…지금도 ‘종북’ 색깔론으로 편가르기”를 한다는 문 대통령 판단은 동의할 만하다.

‘수구보수’ 성향의 이들 지배세력은 해방 이래 정-경-관-언 각 분야를 주도하며 유무형의 기득권 동맹을 유지해왔다. 특히 안보와 경제는 자신들의 전매특허 분야인 양 유능함을 내세웠다. 그런데 요즘 들어 부쩍 이들의 안보·경제 논리조차 바닥을 드러내고 있다.

수십년간 반공·멸공이나 용공좌경·친북좌파 등 용어만 바꿔가며 색깔론 이념공세에 매달린 채, 실제 안보는 ‘한미동맹 절대주의’ 신앙 아래 사실상 미국에 내맡겼다. 이명박-박근혜 정권 동안엔 미·중 사이에서 줏대 없이 오락가락하다 결국 길을 잃었다. ‘붕괴론’에 기대어 북한 정권 무너지기만 기다렸다. 북의 핵·미사일 동결에도 실패한 채 핵능력 강화를 방치했다. 순망치한 처지의 중국 때문에 애초부터 불가능한 가짜 ‘붕괴론’ 위에 집을 지었으니 실패가 당연했다. 이들의 맹목적 친미 노선은 결국 우리를 미-일 동맹의 하위 파트너로 몰아넣고 우리 안보를 그들의 국익에 종속시켰다. 그들이 새 정부 출범 전까지 아무렇지 않게 대북 선제타격을 말했던 게 그 증거다.

최근의 사드 보고 누락 사건은 파산한 안보 논리의 당연한 귀결이다. 중국을 겨냥한 미국 엠디체계 편입을 의미하는 사드 배치는 군사주권 포기의 결과물이다. 북핵과 미사일을 막기 위해 들여온 것도 아니고 실제 막을 수도 없다. 사드 배치 이후 중국의 경제 공세는 ‘한미동맹 절대주의’ 안보 논리의 붕괴를 예고한다. ‘보고 누락’에 김관진, 한민구 두 사람을 조사했다지만, 사건의 실체는 안 봐도 짐작이 간다. 애초부터 국민을 설득할 수 없으니 기습 발표한 뒤 몰래 들여왔고, 결국 새 정부에 설명할 논리도 궁했을 것이다.

수구보수 세력은 수십년간 박정희 시대의 개발·성장 신화를 자랑했다. 그러나 지구적 저성장 시대에 재벌과 수출 중심 경제는 한계에 부닥친 지 오래다. 국제통화기금(IMF)조차 소득주도 성장을 권하는 판이다. 문재인 정부의 ‘고용-성장-복지’ 트라이앵글 정책에 반박하는 이들의 논리는 곤궁하다. 겨우 ‘노동 귀족’ 때리기, ‘복지 퍼주기’란 비판만 되풀이할 뿐 여전히 재벌 위주 ‘낙수효과’ 패러다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당연히 설득력이 떨어진다. 노무현 전 대통령 추도식에서 ‘안보도 경제도 유능함을 보여주겠다’며 자신감을 드러낸 문 대통령의 다짐 앞에 이들의 주장은 더 초라해 보인다.

수구보수 세력의 논리를 생산·전파하는 게 수구보수 언론이라면 그들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건 수구보수 정당이다. 지난 대선에서 홍준표 후보가 막판에 의지한 것도 결국 일부 티케이 ‘지역주의’와 색깔론이었다. “표 안 되는 데는 안 간다”며 “문재인 후보가 대통령 되면 대북문제는 김정은이 대통령”이라고 했다. “당이 정치수준을 못 따라가면 국민들이 없애줘야 한다”고 일갈한 노회찬 정의당 원내대표 말처럼 건강한 보수로 거듭나지 않으면 도태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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