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선거에서 이기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다. 촛불시민이 요구하는 적폐 청산을 담보하지 못하는 대선 승리는 그들만의 권력 교체일 뿐이다. 시민과의 연대가 그래서 중요하다. 야권은 국정 농단 공범인 여당과의 연정을 말할 게 아니라 시민과의 광범위한 개혁협의체를 구성하는 게 먼저다.
정석구
편집인

수구기득권 세력의 반격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해방 이후 70여년을 똘똘 뭉쳐 지켜왔던 기득권인데 쉽게 내놓으려 하겠는가. 한때 ‘명예혁명’이 거론되기도 했지만 혁명은커녕 소소한 개혁마저 반동의 거센 파도에 좌초할 판이다.

그들의 속성을 봤을 때 충분히 예견됐던 일이다. 수구기득권 세력을 대표하는 박근혜 대통령이 누구인가. 멋스럽게 치장하고 온화한 웃음을 지으며 자상한 ‘국모’인 척해왔지만, 그의 몸에는 독재자 박정희의 피가 흐르고 있다. 열 살 남짓부터 20대 후반까지 아버지 박정희의 독재정치를 가까이서 보며 성장했고, 청와대 생활 마지막 5년은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했다. 누구보다 권력의 속성을 훤히 꿰뚫고 있고, 권좌에서 내려오는 순간 나락으로 떨어진다는 사실을 잘 알 것이다. 그런 그에게 국민을 위해, 대통령으로서의 최소한의 명예를 위해 스스로 물러나 달라고 하는 건 너무 순진한 생각이었던 것 같다. 그로부터 자진 하야 따위를 기대하는 건 이제 나무에 올라 물을 찾는 격이 됐다.

새누리당은 어떤가. 사실상 박근혜 개인 정당으로 박 대통령의 국정 농단에 책임이 있는 새누리당은, 국회 탄핵 때만 해도 반성의 기미를 보이는 듯했지만 다시 본색을 드러냈다. 그동안 위기 때마다 새로 태어나겠다며 당명도 여러 차례 바꿨지만 수구기득권 세력의 정치적 이해를 대변하는 정당이라는 본질은 변하지 않았다. 새누리당 대권주자를 포함해 몇몇 의원들은 이른바 ‘태극기 집회’에 참석해 탄핵 반대에 열을 올리고 있다. 위기에 몰릴 때마다 전가의 보도처럼 휘둘렀던 색깔론도 다시 꺼내 들었다.

수구언론도 마찬가지다. 무능하고 비리투성이인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에 대체로 동조했지만 딱 거기까지다. 그동안 자신들이 누렸던 기득권을 포기하면서까지 근본적인 사회 개혁을 주장하지는 않는다. 수구기득권 세력이 우리 사회에서 주류 행세를 할 수 있도록 논리를 제공하고 여론을 조장해온 게 수구언론이다. 수구정치권과 재벌, 그리고 수구언론은 우리 사회 발전을 지체시키고 썩어 문드러지게 한 삼두마차다. 수구언론이 변하지 않는 한 이들의 동맹체제는 강고히 유지될 것이다.

이런 수구 동맹체제가 여전히 작동하고 있는 건 아직도 우리 사회 밑바닥에 건재하는 수구극우세력 때문이다. 1945년 해방 이후 일제 잔재 청산을 제대로 못 한 채 남북이 분단되면서 극심한 좌우 대립을 겪었다. 해방 공간에서 미국의 지원을 받은 우익 세력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실체적, 이념적으로 남한의 주류 세력으로 자리잡았다. 주류 세력이 스스로 진화했다면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도 상당한 발전을 이루고, 남북 화해와 협력도 큰 진전을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자신들의 이익만을 지키기 위해 소수 기득권 독재체제를 유지하고, 북한의 위협을 끊임없이 강조하며 반대 세력을 빨갱이로 몰아 매장했다. 혁명을 하건 개혁을 하건 우리 사회를 규정하고 있는 이런 세력 구도를 늘 염두에 둬야 한다. 수구극우세력이 현실적 영향력을 바탕으로 완강히 버티는 한 양보와 타협에 의한 명예혁명은 불가능하다.

어떻게 할 것인가. 한 가지 분명한 건 기성 정치권에만 이런 역사적 과업을 맡길 수 없다는 사실이다. 촛불이 타올랐던 지난 100여일을 되돌아보자. 정치권은 촛불의 힘으로 떠밀리듯 박 대통령 탄핵소추안을 의결한 뒤 곧바로 ‘벚꽃 대선’ 운운하며 대권 놀음에 빠져들었다. 촛불시민이 만들어준 밥상에 숟가락부터 들고 덤빈 꼴이었다. 가능한 개혁 과제부터 입법화하도록 촉구했건만 1월 국회를 허송하고 2월 국회에서도 별다른 진척을 보이지 않고 있다. 헌재에서 2월 탄핵이 물 건너가자 위기를 느낀 야권이 다시 촛불 동원령을 내렸다. 야권이 자신들의 정치적 입지 강화용으로 촛불을 이용하는 듯하다.

야권은 지금 국면을 정확히 읽어야 한다. 대통령 선거에서 이기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다. 촛불시민이 요구하는 적폐 청산을 담보하지 못하는 대선 승리는 그들만의 권력 교체일 뿐이다. 시민과의 연대가 그래서 중요하다. 야권은 국정 농단 공범인 여당과의 연정을 말할 게 아니라 시민과 광범위한 개혁협의체를 구성하는 게 먼저다. 그래야 시민의 지지를 지속적으로 받을 수 있고, 우리 사회를 근본적으로 뜯어고칠 동력이 생긴다. 촛불은 그저 분위기만 잡아주고, 개혁은 정치권에 맡겨달라는 식이어선 곤란하다. 지금 그런 쪽으로 가는 것 같아 불안하다.

twin86@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