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수
심리기획자

첫 출산의 진통이 길어질 낌새를 보이자 남편이 ‘국밥 한 그릇만 먹고 오겠다’는 말을 했고, 순간 아내는 ‘저 인간이 지금 평생 책잡힐 말을 내뱉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있을까’ 생각했단다. 살다 보면 그런 결정적 순간들을 예감하는 때가 있다. 집권당 대표의 7일 단식쇼를 보면서도 그랬다. 아아, 저이들은 이렇게까지 결정적으로 정치인을 혐오하게 하는 일을 지금 자기들이 하고 있다는 걸 알고는 있을까. 단식쇼에 관심을 집중시켜 청와대를 보호하려는 게 본래 의도였다면 임무수행은 완벽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런 정치적 이해득실과는 상관없이 보는 내내 부끄러움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관통했다.

이정현의 단식쇼는 정치적 측면에서나 인간적 측면에서나 해악에 가깝다. 그는 더 바닥일 수 없을 만큼 정치와 정치인을 희화화했다. 백 미터를 뛰고 마라톤 풀코스를 완주한 듯한 코스프레가 줄기차게 이어졌다. 들것에 실려 나가는 광경만 봤다면 단식 종료가 아니라 총 맞은 사람을 후송하는 줄 알았을 거다.

휠체어에 앉아 예배실 문고리를 잡고 울먹이듯 기도하는 모습을 보면서는 당황했다. 그이는 자기 의도가 그런 퍼포먼스를 통해서 감동적으로 전달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구나. 그런 어처구니없는 현실감각을 가지고도 저렇게 높은 자리까지 올라갈 수 있다는 좌절적 희망을 ‘시전’한 것도 해악이다.

목숨을 건 사회적 약자들의 마지막 호소 수단인 단식투쟁을 이정현은 조롱거리로 만들었다. 영향력의 크기로 따지면 지금 이 나라에서 권력 서열 다섯번째 안일 집권당 대표가, 자기주장을 펼칠 수 있는 수단이 무한대에 가까운 권력자가 어떻게 그리 악착같은가. 앞으로 단식투쟁을 하는 약자들은 이정현의 단식에 쏟아졌던 조롱과 비아냥, 쇼한다는 말을 극복해야 할 부담까지 안게 생겼다. 정말 나쁘다.

이정현은 단식을 중단하며 국가와 민생을 위한 결단이라고 비장하게 선언했다. 아무 말이나 막 던진다. 직장에서 잘린 사람, 자식을 잃은 부모가 자기뿐인가, 왜 저리 유난을 떨어. 그런 시선으로 목숨 건 단식자들을 비난한 적 있다면 한번 생각해 보라. 그런 이들은 어째서 30일, 40일 단식을 할 수 있었는지. 목숨을 걸 만큼 절절한 이유가 있어서 그렇다. 그거 말고는 자신의 억울함을 알릴 방법이 없어서다. 하다못해 다이어트 단식도 10일은 한다. 명분이 분명해서다. 이정현이 단식 하루 만에 무너지기 시작한 건 특이체질이라서가 아니라 명분도 절실함도 없어서다. 그가 단식의 명분으로 내세운 무너진 의회주의 복원은 그러니까 그에게 다이어트 단식만큼의 절실함도 없었다는 얘기다. 그러니 쇼다.

사람은 절박한 순간에도 자기 품위를 지키려는 본능이 있다. 생활고로 집단자살을 택한 송파 세 모녀는 마지막 돈을 그러모아 한달치 월세를 남겼다. 그러지 않아도 되는데 그래야만 자신들의 삶이 덜 비루할 것 같아 그랬을 것이다. 이정현은 7일간의 단식쇼를 통해 인간이 가진 자기 품위의 마지노선을 깡그리 무너뜨렸다. 돈을 받기 위해서는 물불 가리지 않는 사채업자처럼 바닥까지 다 드러냈다. 남들 시선은 개나 주라는 식이어서 부끄러움과 짜증은 온전히 보는 이의 몫으로 남았다. 단식쇼가 이정현류의 정치인에 대한 혐오가 극에 달한 결정적 사건이었다는 것을 당사자인 이정현은 알까 모르겠다. 단식쇼에 관한 글을 쓰는 내내, 이런 얘길 굳이 해야 하나, 쓰는 손이 다 부끄러웠다. 집권당 대표로도 사상 처음이었고 이정현 개인적으로도 첫 경험이었다는 단식농성처럼, 나도 이런 경우는 처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