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권일 ㅣ 사회비평가

일간베스트저장소(일베) 게시판에 상주하며 그들의 일상 담론을 관찰한 적이 있다. 그 무렵 많은 이들이 일베 유저를 “괴물” 내지 “루저”라 부르며 외계인처럼 치부했다. 그런데 들여다보니 그렇지 않았다. 표층언어의 수준에서 그들은 물론 기괴했지만, 심층언어의 수준에서 평범했고 ‘지극히 한국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다.(그 평범하고 한국적인 사고방식을 나는 ‘과잉 능력주의'라 명명한 바 있다.) 일베 게시판을 읽는 게 고통스러웠던 이유는 바로 그것, 일베의 특수성이 아니라 보편성이었다. 보면 볼수록 나는 일베가 사회 어디에나 편재하고 있음을 절감하게 됐다.

엔(n)번방 성착취 사건의 전말을 읽으며 그때가 떠올랐다. 남자들의 표층언어는 차마 고개를 돌리지 않을 수 없을 만큼 끔찍했다. 반면 그들의 심층언어는 지루할 정도로 평범했다. 여기서 일베 유저와 엔번방 남성이 똑같은 놈들이라거나, 엔번방이 일베에서 유래했다는 식의 주장을 펼칠 생각은 없다. 굳이 분류하면 일베는 혐오 표현과 넷우익 이슈이고, 엔번방은 디지털 성범죄다. 사건으로서는 별개다. 그러나 담론 차원에서 이 둘은 동질적이다. 두 사건 모두 중세 마녀사냥의 논리를 공유한다.

일베의 혐오 표현들, 예컨대 여성 혐오, 호남 혐오, 세월호 유가족 조롱 등을 보면 우선 그 표현의 극단성과 저열함에 경악하게 된다. 그런데 찬찬히 살펴보면 그 혐오에는 공통된 정당화 논리가 도사리고 있다. ‘자격과 능력이 없는 자들이 과도한 몫을 요구하고 있으며 따라서 그들은 벌레처럼 경멸당해 싸다’는 것이다. 일베에게 ‘김치녀’ ‘호남 사람’ ‘세월호 유가족’ ‘민주화운동 세력’은 모두 타인의 자원을 부당하게 뜯어먹는 무임승차자로 악마화된다. 겉으로야 “너도 병×, 나도 병×”이라며 일탈과 혼돈을 가장하지만, 사실 일베는 매우 신실한 도덕 공동체다. 무임승차는 배제되어야 하고 능력자-승자의 독식은 보장되어야 한다는 것. 그것이 ‘일베의 도덕’이다.

엔번방 성착취 사건에서도 정당화 논리가 존재한다. 극악무도한 성범죄 사건에 무슨 정당화를 운운하느냐고 할 수 있겠지만, 가해자의 논리를 분석하는 건 그것에 동의해서가 아니다. 폭력이 어떻게 확산하는지 밝히기 위해서다. 가해자들은 피해자를 ‘노예’로 명시해 주인과 노예 관계를 끊임없이 강조했다. 이유는 명백하다. 피해자가 자신과 똑같은 인간이라는 사실을 망각하게 하기 위해서다. 전쟁터에서 집단학살을 벌이기 전에 상대를 벌레나 가축으로 인식하도록 세뇌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인간은 자신에게 가까운 존재에게 고통을 주는 것에 저항감을 느끼지만, 상대가 멀리 떨어져 있거나 특히 자기보다 열등한 존재라는 점을 수용하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잔혹해진다.

폭력을 정당화하는 이런 논리는 누가 봐도 허술하다. 그럼에도 문제는, 이것이 너무 잘 작동한다는 점이다. 마녀사냥의 주역은 종교 재판관만이 아니었다. 여성의 처참한 죽음을 구경하러 온 흥분한 구경꾼 역시 사냥의 주체였다. 그들은 평소 그 여자의 행실이 미심쩍고 음란했음을 고발하며 돌을 던졌다. 엔번방 사건에도 이런 구경꾼이 숱하게 많았다. 그들은 “피해자는 평범한 여성이 아니라 스폰서 알바를 하려던 여자들”이라 선을 긋거나 “일탈계정 같은 걸 운영하니 저런 일을 당하는 것 아니냐”고 했다. <반일 종족주의>의 저자 이우연씨는 “내 딸이 지금 그 피해자라면, 내 딸의 행동과 내 교육을 반성하겠다” “엔번방 피해자들에게도 같은 규칙이 적용돼야 한다”고 페이스북에 썼다. 전형적인 2차 가해다.

폭력의 정당화 논리가 잘 작동하는 배경은 또 있다. 예컨대 “로펌에서 필요한 여자 변호사는 세가지 종류”라며 “부모가 권력자이거나, 남자보다 일을 두배로 잘하거나, 얼굴이 예뻐야 한다”는 발언을 태연히 내뱉던 오덕식 같은 이가 무려 성범죄 전담 재판부의 판사라는 사실. 그리고 이 판사가 성폭력 가해자들에게 온갖 감형 이유를 붙여 무죄와 집행유예를 선고해왔다는 사실. 분명한 건 이런 ‘평범한 사실들’이 켜켜이 쌓여 엔번방의 연료가 됐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차별과 착취에 반대한다”면서도 누군가가 차별과 착취의 이유를 대면 금세 귀를 기울이고 심지어 납득해버린다. 정당한 차별, 올바른 착취는 없다. 차별과 착취의 ‘정당성’을 논하기 시작하는 순간, 우리는 언제든 일베 혹은 엔번방의 남자가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