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여성을 위한 변론
⑦ 미군 기지촌 위안부 소송

미군 기지촌 위안부 국가배상 소송
공개 법정 증언 나선 박언니
열다섯에 직업소개소에서 팔려가

“경찰도, 보건소도 나이 안 물어
경찰서 가면 다시 포주에게 데려가”
공무원은 ‘외화 벌어주는 애국자’라
부르며 ‘미군 잘 대하는 법’ 가르쳐

“국가가 책임지라” 당당하게 요구
2심까지 승소…국가가 해결해야

일러스트 조재석
일러스트 조재석
2019년 1월28일은 김복동 할머니(생전에 할머니로 불리는 걸 좋아하셨다)께서 영면하신 날이다. 할머니는 1992년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가 겪은 잔학상을 증언하였다. 그는 만 14살이던 1940년 공장에 일하러 가야 한다는 말에 속아 위안부로 끌려갔고 1947년 7년 만인 21살에 고국으로 돌아왔다. 누구에게도 하지 못했던 이야기, 45년 만의 고백이자 증언이었다.

처음 그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요 생존자였다가 증언자가 되었고, 우리나라는 물론 전세계 전시 성폭력 피해 여성과 연대하여 싸우는 여성인권운동가로, 평화운동가로 평생을 살았다. 그러나 그는 끝내 일본 정부의 사과를 받지 못하고 떠났다. 아니, 용서하지 못하고 떠났다.

유대인으로서 아우슈비츠에서 기적처럼 살아남은 시대의 증언자 프리모 레비를 떠올려본다. 레비는 누구도 살아남아 증언하지 못할 것이라는 독일군의 비웃음 속에서, 증언하기 위해 살아남았고 자살로 생을 마칠 때까지 평생을 증언자로 살았다. 레비는 생환 뒤 22년 만에 우연히 아우슈비츠 실험실에서 만났던 독일인 뮐러 박사를 만나게 되었다. 레비는 그에게 옛일을 기억하는지 묻는 편지를 보냈으나 그는 자신은 아무것도 몰랐고 거대한 역사 앞에서 어쩔 수 없는 개인일 뿐이었다는 답장을 보내왔다. 진실한 반성과 참회를 찾아볼 수 없는 내용이었다. 그 뒤 레비는 뮐러 박사에게 보내지 못한 편지 초고에 이렇게 적었다.

“적을 용서할 준비가 되어 있으며 아마 그들을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지만 그것은 그들이 후회의 표시를 보이는 경우에만, 그러니까 그들이 적으로 남아 있기를 포기한 경우에만 가능했다. 반대의 경우 여전히 적으로 남아 있고 남에게 고통을 가하려는 고집스러운 의지를 고수하는 사람이라면 그를 용서해서는 안 되었다. 그 사람을 구원할 수 있고, 그와 대화를 나눌 수 있겠지만(나누어야만 한다) 우리에게 의미 있는 일은 그를 심판하는 것이지 용서하는 것이 아니다.”

진심으로 참회하는 적을 용서할 준비가 되어 있었던 김복동 할머니는 끝내 참회하는 적을 마주하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그러나 할머니는 적의 진정한 사과를 받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난 가엾은 피해자가 아니었다. ‘화해·치유재단’이라는 것을 만들어서 참회와 반성이 아닌 용서와 화해를 강요하는 세상에 맞서 단호히 저항하고 싸우면서 심판자로서 용감하게 생을 마감한 것이다.

박언니의 당당한 증언

나는 법정 증언 준비를 위해 박언니(선생님 말고, 편하게 언니라고 불러달라고 하셨다)를 처음 만났다. 우리(기지촌 위안부 소송 대리인단)는 2014년 사상 처음으로 미군 기지촌 위안부 국가배상 소송을 제기한 상태였고, 박언니는 소송 당사자인 원고였다. 국가배상 소송의 원고는 100명이 넘었는데, 어렵게 결심을 하고 소송을 제기하였는데도 그들은 여전히 대중 앞에 얼굴을 드러내는 것을 꺼려, 법정에 올 때나 기자회견장에서 마스크를 쓰고 모자를 눌러쓰는 분이 많았다. 일본군 위안부 생존자조차 피해 사실을 드러내지 못한 분이 대다수(최대 40만명까지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갔다는 연구가 있으나 남한에서 피해자 239명만이 일본군 위안부였다고 밝혔다)였으니, 피해자라기보다는 양공주, 양색시 등으로 불리며 멸시당하던 기지촌 위안부는 오죽하겠는가.

이러한 이유로, 우리가 국가배상 소송을 제기할 당시 ‘위안부’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 문제가 되기도 하였다. ‘미군 위안부’는 국가의 공식 문서와 조례 등의 법령에 등장하는 용어인데도 일각에서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이 있는데 “감히” (양공주가) 위안부라는 용어를 쓰느냐는 것이었다. 소송 중 국가 쪽 대리인도 비슷한 주장을 하면서 위안부라는 용어를 사용하여서는 안 된다는 주장을 하였다. 그런데 정작 김복동 할머니 등과 함께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제기한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는 ‘기지촌여성인권연대’에 소속되어 같이 활동하였고, 국가배상 소송도 적극 지원하였다. 일본군 위안부의 경우 일본 제국이 식민지의 수많은 여성을 강제로 끌고 가 성매매를 강요하였다는 점에서 기지촌 위안부와 다르다 하여도, 위안부 문제는 ‘군인들의 성욕은 해소되어야 한다’는 암묵적인 합의하에 이루어지는 ‘군사화된 성매매’의 문제라는 점에서 일본군 위안부든 기지촌 위안부든 본질적으로 여성인권의 문제라는 점을 가장 잘 이해한 것이다.

박언니는 이처럼 미군 위안부가 ‘위안부’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조차 논란이 되는 상황에서 용감하게 법정 증언을, 그것도 공개된 법정에서 하겠다고 나선 분이다. 법정 증언 때 판사조차도 여러번 정말로 공개 증언을 하겠냐고 물을 정도였다.

내가 박언니를 만난 곳은 이제는 쇠락한 의정부 기지촌(이었던 곳)이었고, 그는 여전히 그곳에서 살고 있었다. 그는 1975년 열다섯 어린 나이에 시골에서 상경하여 일자리를 구하러 찾아간 직업소개소에서 기지촌으로 팔려 갔고, 미군이 빚을 갚아준 40살까지 미군 위안부로 살았다. 그는 법정에서 왜 기지촌에서 나오지 못했냐는 질문에 반문했다.

“도망가면 잡아오고 잡아오면 때리고 돈 얹어서 다른 데로 팔고 그랬습니다. 그래서 자포자기가 되었어요. 그리고 나중에는… 내가 15살 어린 나이부터 기지촌에서 쭉 살았습니다. 아는 것도 없고, 배운 것도 없고, 어디로 가야 할지도 모르겠고 몸은 망가지고, 그래서 그게 싫어서 자살 기도도 여러번 했어요. 감시 안 한다고 나갈 수 있는 것이 아니에요. 제 삶이 망가졌는데 제가 어디로 갈 수 있어요?”

그는 15살 어린 나이였는데도 포주가 만들어준 가짜 신분증으로 성인으로 둔갑되었다. 확연히 어린 얼굴이었는데도 경찰도, 성병검사를 하는 보건소도 그에게 나이를 묻지 않았다. 박언니의 증언에 따르면 그와 함께 일하던 미군 위안부 가운데 많은 이가 미성년자였고, 심지어는 교복을 입은 채로 팔려 온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도와달라고 경찰서에 찾아가면 경찰이 다시 포주에게 데려다주는 경우도 많았고, 도망갔다 잡혀오면 소개비를 빚으로 얹어서 다른 곳에 팔아버리는 일이 반복되니 자포자기하게 되었고, 결국에는 집으로 돌아갈 수도 없는 ‘양공주’ 신세가 되고 만다는 것이다. 경찰, 보건소 직원, 공무원 등은 위생 청결 교육을 명목으로 그들을 모아놓고 외화 벌어 주는 애국자라 칭하면서 미군을 잘 대하는 법을 가르치기까지 하였다.

박언니의 증언은 오래전 언론 기사 및 보존되어 있는 공문서에서도 확인된다. 공문서에 따르면 기지촌을 조성한 이유 가운데 하나는 ‘외화 획득과 국가예산 절약’이었고, 위안부들에게 ‘외화 벌어주는 애국자라고 치켜세우면서 성병 검진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미군 앞에서 ‘가랑이를 벌리지 말라’든가 ‘다리를 꼬고 무릎을 세워 이렇게 앉으라’는 등의 교육을 하였다. 미군을 잘 접대할 수 있도록 영어회화도 가르쳤다. 용산경찰서장이 1971년 6월14일 발표한 내용을 보면 ‘위안부들이 과거에 미군의 불쾌감을 조장한 일을 반성’하고 시정할 것을 요구하면서 ‘이러한 일들이 우리의 적인 북한을 돕고 있으며 이로 인해 국가안보가 악화되니 당면 문제에 대해 적극적으로 협조하여달라’는 내용이 적시되어 있다. 또한 고위 공무원들까지 나서서 기지촌 위안부들에게 전용아파트 건립, 노후보장 등의 각종 혜택을 약속하면서 미군 상대 성매매를 독려한 사실이 확인된다. 국가는 기지촌 위안부들에게 미군이 안심하고 성매매를 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미군을 상대로 한 성매매를 요구하고 이를 통하여 미군의 사기를 ‘진작, 앙양’함으로써 국가안보에 필수인 군사동맹 유지에 기여하는 한편, 외화 획득과 같은 경제적 목적으로 기지촌을 운영·관리해온 것이 공적인 기록들을 통해 확인되는 것이다.

누굴 위한 성병관리였나

박언니가 가장 억울해하는 것 중 하나는 지독한 성병관리였다. 부당한 성병관리 자체도 억울한 것이지만 더욱 억울한 것은 도대체 누굴 위한 것이냐였다. 국가는 기지촌 위안부들의 성병관리를 지독하게 하였다. 그들의 건강을 위한 적법한 관리였다면 그게 무슨 문제가 되겠는가. ‘토벌’과 ‘콘택트’라는 이름으로 보건증을 소지하지 않거나 보건증에 성병 검진 도장이 없다는 이유(토벌)만으로, 또는 성병에 걸린 미군이 성행위 상대로 위안부를 지목(콘택트)하기만 하면 무조건 낙검자(落檢者)수용소로 끌고 가서 감금하고 성병에 감염되었는지조차 확인하지 않고 지독한 페니실린 주사를 놨다. 성행위 상대방으로 여성을 지목한 미군이 ‘내가 너를 지목하였다. 의무대에서 상대 여성이 누군지 생각이 나지 않아 아무나 지목하였다’고 고백한 일도 있었다고 한다. 페니실린 주사는 그 자체로 매우 고통스러운 통증이 따르는데다 부작용도 심하여 쇼크사하는 경우가 자주 있었다. 이 때문에 의사들조차 페니실린 주사를 놓는 것을 꺼렸는데, 이에 보건사회부는 법무부에 의사의 면책을 요청하는 공문을 보내기도 하였다. 국가의 성병관리는 미군이 안심하고 성매매를 할 수 있도록 깨끗한 몸을 준비시키려는 목적이었을 뿐, 결코 그들의 건강을 위한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박언니는 증언을 마치고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하였다.

“꼭 말하고 싶은 게 있습니다. 우리는 태어난 이 나라에서 버려졌습니다. 우리나라가 개입하여 만든 기지촌 거기서 우리는 폭력과 갈취, 이용만 당했습니다. … 국가는 기지촌으로 들어가게 만든 직업소개소와 포주들을 다 묵인해주었습니다. 몸을 버렸으면 돈이라도 벌었어야지 돈 버는 사람은 하나도 없고 포주들만 상상 이상의 돈을 벌었고, 그런 구조를 만든 나라가 우리를 이용만 해먹고 버린 것입니다. 사람들은 우리가 그곳에 갔다고 합니다. 빚은 돈을 벌수록 더 오르고 10대임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도와주는 어른은 없습니다. 억울합니다. 옛날에 박정희 경제개발 했다고 하지만 우리가 애국자 소리 들으면서 달러 엄청 벌어들인 거예요. 우리나라는 미성년자라고 집에 보내는 것도 없고 나라에서 다 버린 거잖아요. 그럼 책임을 져야죠, 달러 누가 다 벌었는데요. 아가씨들이 다 벌어들인 건데, 아파 죽어가도 의사 하나 안 보내고 오로지 성병검진만 했습니다. 성병검진을 미군을 위해서, 미군 요청에 의해서 해준 것이지 우리를 위해서 해준 것은 아니잖아요. 나라의 무관심에 우리의 몸은 병들고 돈도 못 벌고 이용만 당했습니다. 그러니까 나라가 책임을 져야죠. 이 말을 하고 싶었습니다.”

승소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모두의 우려를 뒤로하고, 비록 일부 승소였지만 우리는 2심까지 승소하였다. 법원은 기지촌 위안부들이 경제적 곤궁에 못 이겨 스스로 기지촌에 들어와 성매매를 시작하였거나, 무허가 직업소개소 등을 통해 속아서 기지촌에 유입되었다는 점에서 국가(일본)가 직접 여성들을 강제로 끌고 가 성매매를 강요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와는 다르다고 하면서도 국가가 적극적으로 위법한 성매매를 정당화·조장하고, 이를 뒷받침하기 위한 강제적인 성병치료를 행함으로써 기지촌 위안부들의 성, 나아가 그들의 인간적 존엄성을 군사동맹의 공고 및 국가안보 강화, 그리고 기지촌 내 성매매 활성화를 통한 외화벌이 수단으로 삼았다면서 기지촌으로의 유입 경로와 무관하게 국가는 기지촌 위안부들의 정신적 피해에 대해 배상하라고 판결하였다.

박언니의 삶은 내가 상상하기 어려운 어떤 나락의 끝이었을 것이다. 그의 삶은, 우리 모두가 빚진 그의 삶은 그런 것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박언니는 그 큰 대법정에서 주눅 들지 않고 어려운 이야기를 긴 시간 담담히 증언하였고 이제는 국가가 책임지라고 당당히 요구하였다. 기지촌 위안부 생존자에서 증언자로 거듭나는 순간이었다.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여성들은 전쟁이 있는 곳, 군대가 있는 곳에 전쟁 승리와 군대 유지를 위해 동원되었고, 이용되었으며, 버려졌다. 30만명으로 추산되는 기지촌 위안부 문제는 해결되지 못한 과거사의 문제이자, 해결해야 할 현재 진행형의 문제이다. 그들은 자기들을 이용하고 버린 국가를 용서하고 싶어 한다. 박언니의 외침처럼 국가는 책임을 져라! 철저히 진상을 밝히고 다시는 되풀이되지 않게 하라! 그것이 국가가 용서받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