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하나의 한반도 공동체를 같이 이룰 상대인 북한이나 인구이동, 교역, 교육 차원에서 대단히 가까운 베트남에 대해서는 잘 몰라도, 한국인들은 교양상 구미권에 대해 철저히 배운다. 배우는 정도도 아니고 거의 내면화한다고 봐야 한다.

예컨대 북한과의 통일을 ‘북한의 자원과 저임금 인력을 마음껏 이용할 수 있는 기회’쯤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한국에서 비일비재하다. 이것이 유럽 오리엔탈리즘의 한국 복제판이 아니면 과연 무엇인가?

나는 대학 수업에서 북한사 관련 강좌를 하나 가르친다. 그와 함께 한국 사회정치사 강의도 하고 있어서 가끔 남한과의 비교 차원에서 북한의 역사적 역정을 언급하기도 한다. 이렇게 수년간 강의하다가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내 강의에는 남한 교환학생이나 유학생들도 꽤나 많이 찾아와 수강한다. 그들 중에서 북한이 1950년대 말부터 무상교육과 무상의료를 실천해왔다는 것을 아는 이들이 거의 없다는 사실을 발견했을 때 나는 적지 않게 놀랐다. 칸트의 정언명령이나 조선왕조의 주요 군주들, 아니면 20세기의 주요 미국 대통령들에 대해서 알 만큼 아는, 교양이 풍부한 우수 학생들이, 북한사에 대해서만은 거의 북맹(北盲, 북한을 잘 모르는 사람)에 가깝다. 북한사의 긍정적인 부분들이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에 안 나오고 언론에서도 잘 다루지 않아 그렇게 된 일면도 분명히 있다. 한데 독재 시절과 달리 북한 관련 정보가 국가적으로 더 이상 철저히 통제되는 것도 아니고 인터넷이라는 정보의 바다에서 한글이 아니면 영문으로라도 원하기만 하면 북한 복지체계의 역사에 대한 이야기를 충분히 찾아낼 수 있다. 문제의 핵심은 정보 통제나 제한에 있지 않다. 그것은 바로 관심의 축, 그리고 한국에서의 앎의 지형이다.

한국인 대다수가 북맹이 된 이유를 굳이 찾자면 레드 콤플렉스나 언론들에 의한 여태까지의 북한 악마화 등에 있을 것이다. 한데 한국에서 잘 모르는 것이 꼭 북한만도 아니다. 사실 한국의 보편적인 대외적인 앎의 지형에는 어떤 커다란 이율배반이 내재돼 있다. 한국은 분명히 지리적으로 아시아에 위치한다. 아시아에 위치할 뿐만 아니라, 한국을 먹여살린다는 수출의 대부분 역시 아시아로 향한다. 금년 같으면 전체 수출액의 약 60%는 아시아로의 수출이다. 그것뿐인가? 지금 한국에서 유학하고 있는 약 12만명의 외국인 유학생 중에서 유럽과 북미 출신들은 약 1만명에 불과하고 게다가 그 상당수는 한국 동포 출신들이다. 나머지의 대다수는 아시아, 특히 중국과 베트남, 몽골 등지에서 온 학생들이다. 유학생뿐인가? 전체 국내 체류 외국인들의 대다수는 외국 국적의 해외 동포들을 포함한 아시아 출신들이며(중국 46.7%, 베트남 7.8%, 타이 7% 등등) 유럽과 북미 출신들은 10%도 안 된다. 말하자면 인구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한국의 ‘몸’은 당연히 아시아에 있다. 한데 ‘머리’는 완전히 따로 논다. 언젠가 하나의 한반도 공동체를 같이 이룰 상대인 북한이나 인구이동, 교역, 교육 차원에서 대단히 가까운 베트남에 대해서는 잘 몰라도, 한국인들은 교양상 구미권에 대해 철저히 배운다. 배우는 정도도 아니고 거의 내면화한다고 봐야 한다.

그 내면화 과정의 중심에는 당연히 교육이 있다. 한국은 세계와의 무역으로 먹고살지만, 한국 학교에서 세계사는 필수가 아닌 선택 과목이다. 그런데 소수만이 선택하는 그 세계사 공부 내용도, 따지고 보면 구미 역사 이외에는 주로 중국 등 일부의 동아시아사만 포함된다. 동남아시아와의 교역은 한국으로서는 대미교역보다 비중이 더 크지만, 동남아시아의 역사에 대해서는 단편적인 언급 이상은 없다.

그렇다고 한국인의 성지(聖地)가 된 유럽과 미국, 그리고 일부 인접 지역의 역사 이외에는 세계사를 거의 안 배우는 것만이 문제일까? 북한사는 그나마 한국 근현대사의 맥락에서 아주 부실하게라도 언급되지만, 한국의 평균적인 고졸이 예컨대 북한 문학이나 영화 등을 배웠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한국에는 북한 이외에 숙명적으로 가장 중요한 나라가 중국이겠지만, 세계사 수업에서 중국사를 약간 배울 수는 있어도 중국 근현대 문학은 학교의 어느 과목에도 속해 있지 않다. 믿기지 않는 사실이지만, 러시아만 해도 웬만한 교양인이 충분히 알 만한 중국 문호 바진(巴金, 1904~2005)의 <가>(家, 1933) 같은 역작들을, 한국에서는 중국학 전공자들 말고는 직업 작가들조차도 잘 모른다. 한데 데이비드 샐린저나 베르나르 베르베르를 모르는 한국 독서인을 상상하기는 힘들 것이다. 한국 서적 시장에서 팔리는 책의 약 4분의 1은 번역서지만, 그중의 4할은 번역원서가 영어다. 중국 책의 번역출판은 4%쯤 되고, 동남아 서적의 번역출판은 1%도 안 된다. 학교 교육도 출판시장도 한쪽으로 기울어지는, 극도로 유럽중심주의적 세계관을 뿌리내리도록 열심히 같이 노력한다.

학교나 출판시장에 못지않게 언론들도 서구중심주의적 세계관의 유포에 한몫을 한다. 세계사를 선택과목으로 만든 한국의 학교 교육도 ‘우물 안 개구리’들을 키우지만, 언론도 크게 다를 바 없다. 한국 주요 일간지들의 국제면 비중은 6~10% 정도이며 주요 방송사들의 국제뉴스 비중은 10~14%뿐이다. 한국의 중앙 일간지들의 해외특파원 수는 전체적으로 80명을 넘지 못해 100여명의 특파원을 가진 영국 공영방송 <비비시>(BBC) 하나에 못 미치지만, 그들 중의 대다수는 미국과 유럽에 상주해 있으며 나머지는 중국과 일본에만 몰려 있다. 아시아에 위치한 한국이라는 나라의 언론들은, 이상하게도 아시아 대부분의 나라들에 대한 보도를 영어권 주류 언론에 의존해서 한다. 영미권 통신사나 언론의 기사를 번역한 것 이외에는 남아시아나 동남아시아 등에 대해서는 주로 한국 투자나 한류의 확산 등 자국 중심의 소식들만 보인다.

보도 행태로만 보면 한국에 아시아는 경제적 이용물에 불과하다는 인상을 충분히 주고도 남는다. 반대로 구미권으로부터의 보도들은 현지의 문학, 연예, 사상 동향까지 포함한다. 한국 교양인이라면 프랑스의 포스트모던 철학자 푸코나 데리다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한데 예컨대 중국의 신좌파 사상을 대표하는 추이즈위안(崔之元)의 책 몇 종이 한국어로 번역출판됐다 해도 그를 아는 사람은 거의 극소수의 전공자들뿐이다. 한국에서는 서구중심주의의 철저한 내면화의 결과로 구미권은 ‘보편’이 돼도 나머지 세계는 그야말로 전문가들만 관심을 갖는 ‘특수’에 속한다.

무비판적 서구 추종의 결과들은 매우 심각하다. 구미가 ‘보편’이 되어 버린 만큼 한국에 맞지도 않고 그다지 긍정적인 효과도 없는 담론들도 구미의 ‘새로운 진리’라면 당장에 국내에서도 유행을 탄다. 신자유주의에 의해서 민생이 희생되는 한국 사회에는 차라리 ‘자유시장’의 결점과 재분배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중국 신좌파들의 경제 구상이 더 적절하겠지만, 한국 대학의 경제학과들은 정통 신자유주의 경제학자로 메워져 있다. 미국 대학의 유행을 그대로 따르는 것이다. 학교가 여전히 커다란 병영을 방불케 하고 많은 직장들에서는 여전히 노조를 조직하려는 노동자들이 살인적 탄압을 받는 등 배움터와 일터의 기초적 민주화마저도 이루어지지 않은 한국 사회지만, 한동안 상당수의 한국 지식인들은 들뢰즈와 가타리의 ‘욕망의 정치’나 ‘탈주’ ‘유목주의’ 등을 핵심 화두로 삼았다.

4분의 1의 노동자들이 저임금에 신음하고 3분의 1이 비정규직 신세가 되어 기본적 직장 안정성이나 사회적 권리들도 보장받지 못하는 나라에서는 욕망의 정치보다는 임금착취나 노동배제의 정치학이 사실 훨씬 더 시급한 연구 대상이 돼야 하는데, 계급론적 접근이 더 이상 구미지역에서 유행이 아니라고 해서 한국 지식인 사회에서도 외면을 당해왔다. 서구가 최종의 진리를 상징하는 반면, 한국보다 더 가난한 아시아 나라들은 너무나 쉽게 이미 서구화된 한국이 ‘개발’해 주어야 하거나 경제적으로 이용해도 되는 단순한 대상의 자리에 놓이게 된다. 예컨대 북한과의 통일을 ‘북한의 자원과 저임금 인력을 마음껏 이용할 수 있는 기회’쯤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한국에서 비일비재하다. 이것이 유럽 오리엔탈리즘의 한국 복제판이 아니면 과연 무엇인가?

서구중심주의는 우리 앎의 지형을 심각하게 왜곡시켜 왔다. 한국이 북한과 평등한 통일을 이루고 아시아 이주민들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곳이 되자면 우리 안의 오리엔탈리즘으로부터의 해방이야말로 급선무다.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대 교수·한국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