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정희진의 어떤 메모
<목련이 질 때>, 호인수 지음, 분도출판사, 2016

호인수 시인은 1984년 <실천문학>으로 등단했다. 두 권의 시집을 냈다. 최근 출간된 <목련이 질 때>에 수록된 첫 번째 시는 ‘장발(長髮)’이다.

“나를 무슨 반역죄인처럼 / 눈 부릅뜨고 잡으려 하지 마세요(중략) / 친구의 울음소리마저 들을 수 없는 귀가 부끄러워 / 가리고 다니는 것뿐이에요 / 세상에는 아부도 많고 위선도 많지만 / 이 부끄러움을 가리지 않고는 / 죽어도 얼굴을 들 수가 없어 / 마지막 붙들고 있는 나의 양심이에요 / 정말이에요”(1978년 작). 얼굴을 가리기 위한 장발이라니. 시인은 40년 전부터 부끄러웠구나.

“나의 때 묻은 두 손으로 / 하얀 네 이마에 물을 붓는다 (중략) / 훗날 네가 부모 되어 / 너의 아기 품에 안고 오늘처럼 내게 올 때도 / 우리는 아기 앞에서 / 이렇게 부끄러우면 어쩌지”(‘유아세례를 주며’, 43쪽). “사랑은 멀리 있어서 / 아름다운 것”(56쪽). 그렇다. 사랑은 가까이 있으면 부끄럽다. 심지어 불편하다. ‘혼자 드리는 미사’(91쪽). 이 시는 제목만 있어도 된다. 삶은 달걀의 곱디고운 속살을 차마 먹을 수 없는 심정(127쪽)! 왜 이 지면은 9.5매일까. 처음으로 원망스럽다. 여기 그의 시를 다 옮겨야 하는데.

그가 40년 동안 쓴 시를 어찌 갈무리하겠는가마는, 젊은 날 ‘실천문학적’ 시보다 나이 들어가면서 쓴 시가 더 좋다. 알려졌다시피 시인은 현직 신부다. 유아세례를 주는 자기 손에 때가 묻었다고 쓴다. ‘호인수 신부님’이 이렇다면 나는 아기를 바라볼 수 없다. 때 묻은 내 시선이 닿을 테니. 시인은 우리가 때 묻은 것을 알고 또다시 부끄러워한다.

나는 하고 싶은 말이 있다. 세상에서 가장 부정의한 일을 알고도 권력이 두려워 말 못한다. 그 사실만으로도 속이 썩는데 사람들은 “좋아요”를 누른다. 좌절을 감당할 수 없다. 사람들은 부끄러움을 모르니 못 알아듣는다. 내 말은 가슴에서 썩고, 머리에 뭉쳐 있다. 죽을 것 같아서 머리에 칼집을 냈다. 조금 숨통이 트인다.

감히 시인이 부럽다. 나도 그처럼 표현하고 싶다. 소박함, 외로움, 슬픔. 앞으로는 이 단어들을 함부로 쓰지 못할 것 같다. 특히 외롭다는 말은 삼가야겠다. 그의 깊은 외로움이 우러러보인다. 글 쓰는 이나 수도자는 세상과 진리를 매개하는 사람이다. 이들의 일은 외로워야만, 끊임없이 부끄러워야만 가능하다. 부끄러움은 대가가 큰 비싼 지성이다. 매순간이 경각과 정결, 고통이어야 가질 수 있는 태도다.

나는 부끄러움이 인간됨과 관계의 최소 조건이라고 생각한다. 지금 세상 법치는 자기도취와 욕망이다. 이제는 무엇이 후안무치이고 부끄러움인지에 대한 판단조차 흐려졌다. 비윤리, 부끄러움, 뻔뻔스러움에 대한 기준이 사라지다 보니 상식적인 사람들은 루저 의식을 갖게 되었다. 이명박 정권과 노무현 대통령 서거 때부터 나의 화두는 뻔뻔함이다. 뻔뻔함에 저항하면 더 더러운 인간, 비참한 인간이 되는 세상이다.

다시 ‘장발’로 돌아가면, 시인은 평생 부끄러웠던 것 같다. 대개, 1970년대 장발 단속에 대한 비판은 ‘자유를 위해서’였다. 반면 시인은 부끄러워서 얼굴을 숨기기 위한, 양심을 위한 장발이다. 나는 예술의 독창성이 자유분방함에서 나온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 시인은 그것을 증명한다. 나는 기쁘다.

정희진 평화학 연구자
정희진 평화학 연구자
부끄러움을 깨달은 인간의 처음 행동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몸을 숨기는 것이다. 그런데 검은 사제복은 얼마나 두드러져 보이는가. 게다가 사람들은 “신부님, 신부님” 하며 모셔댄다(얼마나 괴로웠을까).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들과 싸우느라 그저 탈진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부끄러움을 견디며 시를 쓰는 이도 있다. 나는 부끄러움을 다시 배운다.

얼마나 외로워야 몸이 돌이 되겠는가. 그의 시는 사리(舍利)다. 가톨릭 신자인 지인들과 “신부 하시긴 아까운 분”이라고 농담을 나눴지만, 나는 그의 시가 소명에서 뿜어진 것임을 안다.

정희진 평화학 연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