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과학]
몸 변형에 보호막 형성, 자살까지
이스라엘 바이츠만연구소 연구진
4만5000개 미생물 게놈 탐색 끝에
몰랐던 10가지 면역시스템 발견

분자생물학 역사를 바꿔놓은
제한효소·유전자가위 분자처럼
생체분자 제어 새 도구 찾아낼까
박테리아는 단세포 생물이지만 바이러스의 공격에 맞서 다양한 면역방어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최근 이스라엘 연구진이 이전까지 몰랐던 박테리아의 여러 면역방어 시스템을 새로 발견했다. 왼쪽의 전자현미경 영상은 대장균 껍질에 달라붙은 많은 바이러스들(작은 공 모양)을 보여준다. 오른쪽은 바이러스를 중심으로 확대한 영상. 이스라엘 바이츠만과학연구소 제공
박테리아는 단세포 생물이지만 바이러스의 공격에 맞서 다양한 면역방어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최근 이스라엘 연구진이 이전까지 몰랐던 박테리아의 여러 면역방어 시스템을 새로 발견했다. 왼쪽의 전자현미경 영상은 대장균 껍질에 달라붙은 많은 바이러스들(작은 공 모양)을 보여준다. 오른쪽은 바이러스를 중심으로 확대한 영상. 이스라엘 바이츠만과학연구소 제공
지구상에 살아남은 가장 오래된 유기체로 단세포 미생물인 박테리아(세균)는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방어 전쟁을 수십억년 동안 치르고 있다. 박테리아에 감염하는 바이러스, 즉 박테리오파지(줄여서 ‘파지’)에 맞서 박테리아는 가장 오래된 면역방어 시스템을 구축하고 있는 셈이다.

박테리아의 면역방어 체계가 과학자들에 의해 알려진 건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100년 전 무렵 박테리아에 감염하는 파지 바이러스의 존재가 알려진 이래, 파지는 “적의 적은 친구”라고 말하듯이 나쁜 병원균을 없앨 도구로서 연구되기도 했고, 젖산균 같은 이로운 균을 지키기 위해 물리쳐야 할 대상으로 연구되기도 했다.

그러면서 드러난 파지와 미생물 간의 공격과 방어 시스템은 과학자들의 생명과학 실험실에도 크나큰 기여를 했다. 바이러스 디엔에이(DNA)를 잘라 파괴하는 미생물의 생체분자인 ‘제한효소’와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는 유전자 염기서열을 자르고 붙이는 유전자 연구의 중요한 도구가 되었다.

하지만 이게 전부는 아닌 듯하다. 최근 발표된 연구 결과에서 바이러스에 맞서는 박테리아의 면역방어술은 지금까지 알려진 것보다 훨씬 더 많고 다양하다는 게 확인됐다. 적어도 열가지의 새로운 방어 시스템이 추가됐다.

박테리아에 붙은 많은 바이러스들의 모습. 쉽게 볼 수 있게 색채로 처리됐다. 위키미디어 코먼스 제공
박테리아에 붙은 많은 바이러스들의 모습. 쉽게 볼 수 있게 색채로 처리됐다. 위키미디어 코먼스 제공
알려진 박테리아의 방어전략들

그동안 밝혀진 미생물의 면역방어 체계도 이미 다양하다. 먼저 바이러스가 침입하지 못하도록 박테리아의 바깥 껍질에서 차단하는 방법이다. 바이러스는 박테리아 껍질에 있는 특정한 ‘수용체’ 단백질과 결합함으로써 침투하는데, 그 수용체의 단백질 구조를 변형해 바이러스가 아예 달라붙지 못하게 피하는 방법이다. 미생물이 일정 수 이상으로 모일 때에는 생물막(바이오필름)을 형성해 바이러스 공격을 저지하기도 한다. 감염된 박테리아는 바이러스의 증식과 확산을 막기 위해 세포자살에 나서기도 한다.

침입한 바이러스를 무력화하는 대표적인 방법은 이미 분자생물학에서 널리 알려진 ‘제한효소’ 분자다. 박테리아는 자신의 디엔에이에는 메틸이라는 화학물질을 붙여 보호하고, 메틸 물질 없는 바이러스 디엔에이 또는 플라스미드라는 외래 디엔에이 분자가 침입할 땐 이를 식별해 자르는 방어술이 바로 제한효소 시스템이다. 제한효소의 발견과 응용은 1978년에 노벨 생리의학상의 수상 업적이 됐다.

미생물의 더욱 놀라운 신공은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다. 침입했던 바이러스의 유전자 염기서열 정보를 제 몸의 유전체(게놈)에 기록해두었다가 똑같은 염기서열의 침입자가 나타났을 때, 정확히 그 부위를 잘라 바이러스를 무력화하는 박테리아의 ‘적응 면역’ 체계다. 생명과학 실험실에서 표적으로 삼은 유전자의 특정 염기서열을 찾아 절단하는 유전자 가위 기술의 원조가 이런 박테리아의 방어 전략에서 나왔다.

지금까지 알려진 면역방어 체계 외에 박테리아의 방어 전략은 더 없을까? 이런 물음을 품은 이스라엘 연구자들이 2년 동안의 연구 끝에 최근 흥미로운 연구 결과를 내놓았다.

‘침입 감지와 자기보호’ 또 다른 방식들

이스라엘 바이츠만과학연구소의 로템 소레크 교수 연구진은 최근 “박테리오파지의 공격에 저항하는 아홉가지의 유전자 세트, 외래 유전물질인 플라스미드의 침입에 대항하는 한가지의 유전자 세트를 박테리아들에서 새로 찾아냈다”고 과학저널 <사이언스>에 보고했다. 열가지 방어 체계에는 여러 민족 신화들에 등장하는 수호신의 이름들(조랴, 토에리스 등)이 붙여졌다.

연구는 방대한 유전자 데이터베이스에서 후보 유전자들을 추려내고 그 기능을 실제 실험으로 검증하는 과정을 거쳤다. 먼저, 연구진은 이미 발표된 박테리아 4만5천여 종의 유전체 정보 데이터베이스를 스스로 개발한 소프트웨어로 탐색해 수백만 유전자 가운데에서 후보 유전자 수백 개를 추렸다. 다시 실제로 면역방어를 어떻게 행하는지를 실험에서 확인할 유전자 시스템을 26가지로 좁혔다.

이어 합성생물학 기업에 의뢰해 26종의 유전자 세트를 제작했다. 연구진은 이들을 대장균 등에 하나씩 넣어 유전자 세트의 면역방어 기능을 살폈다. 이렇게 해서 발견된 박테리아의 방어 유전자 세트 중에는, 아홉 가지가 바이러스에 대응하는 것들이었으며 한 가지는 플라스미드에 대응하는 것으로 판별됐다.

이 연구의 의미를 해설하는 짧은 논문을 <사이언스>에 실은 김진수 서울대 교수(기초과학연구원 유전체교정연구단장)는 “유전자 하나 또는 여럿(최대 14개)으로 이뤄진 방어 시스템들이 외래 유전물질을 감지하고 파괴하는 역할을 한다는 게 밝혀졌다”며 “아직 밝혀지지 않은 면역방어 체계가 훨씬 더 많을 것”이라고 말했다.

아직 충분한 연구가 이뤄지지 않은 첫 발견 연구에서, 연구진은 어떤 방어술들을 엿보았을까? 그중에는 바이러스 침입을 막다가 실패해 감염될 때 스스로 세포자살로 나아가는 박테리아 세포막의 유전자들도 있었다. 다른 유전자 세트는 외래 유전물질인 플라스미드의 침입이 감지될 때 박테리아 자신의 디엔에이를 보호하는 기능을 활성화했다.

또한 동식물을 비롯해 인간 면역 체계에서 특정한 병원성 분자의 패턴을 인식해 작동하는 중요한 면역 체계가 이번에 박테리아에서도 처음 발견됐다. 김진수 교수는 “세균, 고세균, 진핵생물에 모두 공통적인 (선천성) 면역 시스템이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흥미로운 발견”이라고 말했다. 이는 면역 체계의 오래된 공통 기원일 가능성을 보여주는 셈이다.

“새로운 유전자 편집 도구?” 기대감

이번 발견은 그저 단순한 단세포 생물로 여기던 박테리아가 생물학자들이 생각해온 것보다 훨씬 더 다양하고 정교한 면역방어 체계를 갖추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면역 체계의 진화와 뿌리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단서들도 제시됐다. 이와 함께 제한효소나 유전자 가위만큼 혁신적이진 않을지라도, 박테리아의 면역방어 체계에서 생체분자를 좀 더 정교하게 제어할 수 있는 새로운 분자생물학 도구가 앞으로도 더 발굴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가 높아지고 있다.

소레크 교수는 보도자료에서 “모든 면역 체계가 본래 매우 유연하면서도 특정한 방식으로 감염원을 표적으로 삼아 작용하기에 생명공학 기술에 응용할 수 있는데, 이번에 발견된 면역 체계들에서 새로운 유전자 편집 도구가 나올 수도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김진수 교수는 “면역방어 체계는 적과 자신을 구별하는 것을 전제하기 때문에, 특정한 디엔에이, 아르엔에이(RNA), 단백질을 인식하는 시스템은 분자생물학 연구와 신약 개발에 활용될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오철우 선임기자 cheolwoo@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