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생각] 정여울의 문학이 필요한 시간
③ 예민할 권리, 감동할 권리

“지금까지 철학자는 세계를 이리저리 해석해왔을 뿐이다. 이제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혁하는 것이다.” 마르크스의 문장이었다. 책에서 오래전에 읽었던 문장을 예상치 못한 공간에서 ‘돌에 새긴 문장’으로 만났을 때, 내 가슴은 산산이 조각나버렸다. 문학은 꼭 시나 소설 속에만 잠자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를 겁먹은 새내기의 눈빛으로 ‘사회과학서적’으로서 읽었을 때의 감동도 컸지만, 불현듯 낯선 이국땅에서 그 문장을 다시 읽으니 너무도 ‘문학적으로’ 다가왔다.
독일 훔볼트대학 입구 계단 위에 새겨진 카를 마르크스의 문장. ⓒ이승원 작가
독일 훔볼트대학 입구 계단 위에 새겨진 카를 마르크스의 문장. ⓒ이승원 작가

세상의 모든 아름다움이 나를 총공격하는 듯한 날카로운 아픔을 느낄 때가 있다. 스물아홉, 첫 유럽여행을 떠났을 때였다. 유럽에서 만난 모든 건축물과 미술작품, 골목길과 저잣거리의 정겨움, 들리는 모든 음악의 아름다움이 나를 파괴하는 것 같았다. 세상의 모든 아름다움이 나를 찌르고, 짓이기는 느낌. 그런데 그 아픔이 싫지 않았다. 오히려 나는 그 아픔을 나도 모르게 반겼던 것 같다. 그 아픔은 내게 잃어버린 나의 시간을 되찾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때 아름다움을 아름답다고 생각할 권리를 잃어버린 상태였다. 아름다움 따위는 느낄 시간이 없어, 문학이나 예술의 향기 따위는 감상할 여유가 없어, 나라는 존재를 향해 다가오는 모든 세상의 빛들을 흡수하지 못하고 필사적으로 반사하고 있었다. 사랑이 다가와도 ‘사랑할 시간 따윈 없다’고 생각했고, 친구가 다가와도 ‘우정 따윈 키울 시간이 없어’라고 생각했다. 사랑하면서도 사랑에 내 전부를 던지지 못했고, 벗을 그리워하면서도 벗에게 마음을 완전히 열어 보이지 못했다. 온몸이 고슴도치처럼 날 선 가시들로 뒤덮여 있어 ‘세상의 아름다움을 느낄 권리’를 잃어버린 시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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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으로 다가온 마르크스의 문장

서른이 넘어 두 번째 유럽여행을 떠났을 때, 나는 잃어버린 나 자신의 감수성을 찾기 위해 홀로 멀리 떠나왔음을 느꼈다. 첫 번째 유럽여행이 ‘느낄 수 있는 심장’을 잃어버린 나를 발견하게 해주었다면, 두 번째 유럽여행은 이제 ‘간신히 되찾은 청춘의 심장’으로 세상의 아름다움을 마음껏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 처음으로 베를린 필하모니의 연주도 직접 들었고, 이름 모를 화가의 그림 앞에 한나절이 다 가도록 앉아 있기도 했으며, 두꺼운 소설책과 화집을 잔뜩 사서 여행용 캐리어의 1인당 무게 제한을 훌쩍 넘기기도 했다. 내가 다닐 수는 없지만 남몰래 동경했던 훔볼트대학 교정을 하염없이 걷기도 했다. 그때 훔볼트대학으로 올라가는 계단에서 이 문장을 만났다. “지금까지 철학자는 세계를 이리저리 해석해왔을 뿐이다. 이제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혁하는 것이다.” 마르크스의 문장이었다. 책에서 오래전에 읽었던 문장을 예상치 못한 공간에서 ‘돌에 새긴 문장’으로 만났을 때, 내 가슴은 산산이 조각나버렸다. 문학은 꼭 시나 소설 속에만 잠자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를 겁먹은 새내기의 눈빛으로 ‘사회과학서적’으로서 읽었을 때의 감동도 컸지만, 불현듯 낯선 이국땅에서 그 문장을 다시 읽으니 너무도 ‘문학적으로’ 다가왔다. 철학자의 임무가 마치 작가의 임무처럼 느껴졌다. ‘철학’을 ‘문학’으로 바꾸어도 그대로 성립할 것만 같은 문장이었다. 진정 좋은 작가가 되고 싶다면, 세계를 요모조모 해석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바꿀 수 있는 용기를 지녀야 하지 않을까. 나의 마비된 감수성을 한 올 한 올 깨우는 향기로운 문장의 힘이 거기 꿈틀거리고 있었다. 마르크스의 문장이 왜 그토록 시적으로 들렸을까. 그건 아마도 내가 너무도 간절히 갈망했기 때문일 것이다. 세상을 바꾸기에 앞서 우선 망가진 내 인생을 수리하고자 하는 마음이 너무 간절했던 것이다. 그 문장은 온갖 은유와 상징의 소용돌이를 몰고 와 내 심장을 세차게 고동치게 했다. 마치 시처럼, 음악처럼, 폭풍우처럼.

세상의 아름다움을 느낄 준비가 되니 예전에는 무덤덤하게 지나치던 모든 것들이 아침햇살처럼 환하게 다가왔다. 문학과 음악, 그림과 무용 등은 우리에게 ‘더 아름다운 세상을 꿈꿀 권리’를 선물하는, 서로 지휘하거나 통제하지 않는 무언의 오케스트라다. 사랑할 준비가 되니 내가 그동안 사랑하지 않았던 모든 시간들이 못 견디게 아까웠다. 아끼고 소중히 여길 준비가 되니 내 곁의 사람들 모두의 아픔이 내 아픔처럼 가까워졌다. 이제 문학과 예술을 사랑하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었다. 아름다움이 나를 공격할까봐 아름다움은 죄다 피해다녔던 시절은 끝났다. 우리에게는 더 많은 아름다움을 경험할 권리가 있다. 그런데 햇살이나 공기처럼 가만히 있어도 저절로 흡수할 수 있는 세상의 아름다움이 있는가 하면, 문학이나 음악이나 그림처럼 반드시 자발적인 노력을 기울여 찾아다녀야 할 세상의 아름다움도 있다. 무언가를 사랑할 권리를 회복하자 하염없는 기다림의 시간마저 즐길 수 있게 되었다. 좋아하는 작가의 신작이 나온다는 소식을 들으면 설레는 마음으로 출간을 기다리고, 기갈 들린 사람처럼 출간 첫날에 책을 사서 한 문장 한 문장 아껴 읽다가, 다 읽고 나면 벌써부터 다음 책을 기다리기 시작하는 마음. ‘이 소설이 영원히 끝나지 않았으면’ 하는 안타까움과 빨리 다음 소설을 읽고 싶은 조급증마저도 우리가 문학을 통하여 느낄 수 있는 아름다움의 일부다. 삶에 대한 설렘을 회복하는 것, 세상에 대한 놀라움을 되찾는 것, 이 모든 것을 느끼는 감수성의 심장을 되찾는 것. 그것이 문학을 통해 우리가 쟁취할 수 있는 생의 기쁨이다.

일상 속의 이토록 문학적인 순간

얼마 전에 나의 멘토이신 문학평론가 황광수 선생이 따스한 에피소드를 들려주셨다. 힘겨운 투병생활 끝에 건강을 회복하신 뒤 오랜만에 시인 김정환 선생을 만나셨다고 한다. 김 선생은 옷은 늘 같은 걸 입으셔도 책은 늘 다른 걸 읽고 계시는 소문난 독서가이신데, 병마에서 막 힘겹게 놓여난 70대의 황 선생에게 엄청난 책을 선물하셨다. 바로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그것도 무려 불어판이었다. 한국어로 읽어도 숨 막히는 분량과 밀도를 자랑하는 이 대작을, 불어판으로 읽어보라고 선물하는 시인의 마음은 무엇이었을까. 황 선생은 깜짝 놀라서 고마움보다는 걱정스러움을 표현했다. “난 불어도 못하는데 왜 이걸 주는 거야?” 김 선생은 마치 수줍은 고백을 하듯, 오랜 투병생활에서 막 벗어난 친구에 대한 반가움과 그리움을 가득 담아 이렇게 말했다. “그러니까, 오래오래 살아달라고.” 친구여, 부디 아프지 말고 오래오래 살아남아서, 지금은 불어를 못하지만 언젠가는 불어도 배워서, 그 기나긴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으라는 따스한 메시지. 이것이 바로 나를 감동시키는 일상 속의 ‘문학적인 순간’이다. 책 속의 문장이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 순간이 와도, 우리 마음속에는 ‘이야기의 유전자’와 ‘은유와 상징의 유전자’가 남아 있어 이토록 문학적인 모든 순간들을 환하게 축복해주지 않을까. 때로 문학은 텍스트 없이도 힘을 발휘한다. 이제 각자 60대와 70대 중반을 넘긴 시인과 평론가를 그 어떤 학창시절 동창보다 더 끈끈한 우정으로 묶어주는 단 하나의 원동력은 바로 문학을 향한 멈출 수 없는 사랑이다.

벨기에 안트베르펜(앤트워프) 시립도서관에서 책을 읽는 여행자의 모습. ⓒ이승원 작가
벨기에 안트베르펜(앤트워프) 시립도서관에서 책을 읽는 여행자의 모습. ⓒ이승원 작가
“여기서는, 기필코 안전할 거야.” 책을 읽는 동안 나도 모르게 이렇게 중얼거릴 때가 있다. 책을 읽는 순간만큼은 고통에서 놓여날 수 있으니까. 안트베르펜(앤트워프) 시립도서관에서 하염없이 책을 읽으며 시간 가는 줄 모르는 한 할아버지를 바라보며 나는 이상하게도 마음이 편안해졌다. 말은 안 통하지만 따스한 동지를 만난 것 같아서. 책을 읽고 있는 사람들만 보면 왠지 다가가서 말을 걸고 싶어지고, 거리낌 없이 친구가 되고 싶어진다. 책이란 낯선 나라에서도 내가 아직 나임을, 또 다른 나로 변신해도 결국 더 커다란 나임을 확인하게 해주는 아름다운 미디어다. 독일의 시인 라이너 쿤체는 ‘한잔 재스민 차에의 초대’라는 아름다운 제목의 시로, 우리에게 문학이라는 이름의 열차를 탈 수 있는 무료기차표를 발급해준다. “내려놓으세요/ 벗어놓으세요/ 당신의 슬픔을/ 여기서는 침묵하셔도 좋습니다.” 외투를 벗듯이 슬픔을 벗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셔츠를 벗듯이 분노와 괴로움과 질투를 벗어놓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시인 라이너 쿤체는 바로 그 어려운 일이 오직 ‘차 한 잔’을 함께 할 수 있는 시간만 있다면 가능하다고 속삭이는 것 같다. 나는 그 차 한 잔의 여유에 가장 어울리는 파트너가 시집이나 소설책이었으면 좋겠다. 책을 읽는 동안만은 분노를 철퍼덕 내려놓고, 슬픔을 훌훌 벗어놓고, 이 세상 모두와 함께 있을 수도, 이 세상 그 누구로부터도 벗어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지상의 모든 곳에서 눈부신 문장을 보는 사람이 되고 싶다. 모든 곳에서 신이 깜빡 흘리고 간 아름다운 문장을 용케 주울 수 있는 밝은 눈을 가진 사람이 되고 싶다. 감옥이나 무인도에 갇히더라도, 누구도 나의 힘, 즉 ‘이해하고, 공감하고, 소통하는 의지’를 빼앗지 못하도록. 책 한 권도 없는 빈털터리가 될지라도 내 마음속에서만은 내가 읽었던 모든 책들의 페이지가 숨 가쁘게 넘어갈 것이다. 그 어떤 권력도 우리의 소중한 권리, 문학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권리를 빼앗지 못하도록. 어떤 극한의 상황에서도,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이 뜨거운 심장을 잃지 않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