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김영민의 논어에세이2
⑩ 유교의 본질
유교 때문에 이 꼴이 되고 말았어!
유교가 있어서 발전할 수 있었어!
좋건 싫건 ‘유교’ 불러내는 사람들

공자 이후 2000년 넘는 시간 동안
변형되고 복잡해진 ‘유교’ 의미
다시 부적절하게 단순화해 사용

불변하는 유교 본질은 없어
거리 두고 볼 때 정확한 이해 가능
2016년 3월16일 서울 종로구 성균관로 성균관 대성전에서 제관들이 공자를 비롯한 유교의 성현들을 추모하는 제사 의식인 ‘춘기석전’에 참여하고 있다. 음력으로 2월과 8월에 두차례 열리는 석전은 중요무형문화재 제85호로 지정돼 있다.  김성광 기자 flysg2@hani.co.kr
2016년 3월16일 서울 종로구 성균관로 성균관 대성전에서 제관들이 공자를 비롯한 유교의 성현들을 추모하는 제사 의식인 ‘춘기석전’에 참여하고 있다. 음력으로 2월과 8월에 두차례 열리는 석전은 중요무형문화재 제85호로 지정돼 있다. 김성광 기자 flysg2@hani.co.kr
논어 에세이 연재를 ‘유교’(儒敎)에 관한 글로 마무리하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유교야말로 <논어>, 공자 등의 말과 늘 함께하는 연관 검색어가 아닌가. 앞선 연재에서 언급했듯이, 공자 생전에는 유교라고 지칭할 만한 제도화된 종교, 전통, 혹은 사회적 정체성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자는 유교의 창시자인 것처럼, 유교 전통은 공자의 메시지를 고스란히 따른 것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과연 공자와 <논어>의 메시지는 유교 전통 속에서 온전히 보존될 수 있었을까?

프랑스 시골도 ‘유교적’

어린 시절 학교에서 배운 것 중에 지금도 기억에 남는 것은 ‘말 전달 놀이’다. 선생님은 맨 앞에 앉은 학생에게 귓속말로 어떤 메시지를 건넨다. 그러면 그 학생은 자기 뒤에 앉은 학생에게 역시 귓속말로 그 메시지를 전달한다. 그런 식으로 교실 맨 끝에 있는 학생에 이르면, 메시지의 내용은 원래 내용과 크게 달라져 있다. 이러한 놀이를 통해 선생님은 메시지 전달이라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그리고 전달 과정을 통해 메시지가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는 것을 학생들에게 가르쳐 주었다.

예를 들어보자. 선생님은 맨 앞의 학생에게 “김영민 교수와 배우 전도연이 닮았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그러나 맨 뒤 학생이 결국 전해 들은 메시지는 “김영민이 칸 영화제에서 여우 주연상을 수상했다”는 내용이다. 어떻게 하여 이런 왜곡 혹은 변화가 일어났을까? “김영민과 전도연이 닮았다”는 메시지는 여러 학생의 귓속말을 거치는 동안 “전도연과 김영민은 누가 보아도 똑같다”를 거쳐 “김영민과 전도연은 사실 쌍둥이다”를 거쳐 “김영민은 전도연의 줄기세포를 복제한 거다”를 거쳐 “바쁜 전도연을 대신해서 복제 인간 김영민이 칸 영화제 수상식에 대리 참석하여 여우 주연상을 받았다”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불과 학생들 몇십명 간의 메시지 전달 과정에서 이러한 변형이 일어날 수 있다면, 2000년이 훌쩍 넘는 시간 동안 공자 혹은 <논어>의 메시지가 변형되지 않을 리 있겠는가. 소위 유교 전통 안에 원래는 없던 여러 가지 잡다한 요소들이 그 과정에 끼어들지 않겠는가. 그리하여 복잡해진 전통을 다시 간명하게 정리하는 과정에서 부적절한 단순화가 일어나지 않겠는가. 그 결과, 오늘날 누군가 ‘유교란 이러이러한 것이다’라고 규정하면, 그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은 ‘유교’ 전통 속에서 얼마든지 그와는 다른 특징을 찾아낼 수 있게 되어 버렸다. 예컨대 누군가 유교는 상업을 억압하는 특징이 있다고 주장하면, 그에 반대하는 이는 ‘유교’ 전통 속에서 상업을 선양하는 특징 역시 찾아낼 수 있다. 누군가 유교는 개인을 억압하는 특징이 있다고 주장하면, 그에 반대하는 이는 ‘유교’ 전통 속에서 개인을 고무하는 특징 역시 찾아낼 수 있다.

긴 역사를 가진 전통을 몇몇 특징으로 단순화하는 경향 때문에, 소위 유교의 특징은 다른 문화권에서도 얼마든지 발견되기도 한다. 여성주의 영화의 걸작, 아녜스 바르다의 <노래하는 여자, 노래하지 않는 여자>는 1960~70년대 여성운동이 싸워야 했던 당시 프랑스 사회의 면면을 보여준다. 억압적인 부모와의 갈등, 낙태와 피임을 둘러싼 문제들, 가족제도의 위계적 성격 등등. 이 영화에서 그리고 있는 프랑스 사회의 문제들은 오늘날 많은 이들이 ‘유교 문화’라고 부르는 면면과 다르지 않다. 역사학자 유진 웨버가 묘사하는 19세기 말 프랑스 향촌 사회 모습 역시 놀랍게 ‘유교적’이다. 남녀 간의 성차에 대한 강조, 남아 선호, 가족 유대 등 당시 프랑스 향촌 사회의 특징은 이른바 단순화된 ‘유교’ 사회의 특징과 별반 다르지 않다. 그렇다면 유교라는 단어는 제반 현상들을 범박하게 지칭하는 용어로는 쓸모가 있을지 몰라도, 특정 사회의 독특한 면모를 적시하기에는 너무 투박한 용어라고 할 수 있다.

유용한 동시에 무용한 단어

그 투박함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유교’라는 말을 지나치게 즐겨 사용한다. ‘유교’란 소위 한국 전통문화의 핵심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고, 사라져야 할 과거의 적폐를 지칭하는 말이기도 하고, 가부장적 질서와 동의어이기도 하고, 전근대적 요소를 총칭하는 말이기도 하고, 기독교, 불교, 이슬람교에 상응하는 동아시아의 종교를 지칭하는 말이기도 하고, 그냥 별 뜻 없이 사용되는 ‘아무 말’이기도 하다. 유교라는 말을 사용하는 게 불가피할 때도 있지만, 사용 빈도를 볼 때 유교라는 말에 대한 사랑은 지나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유교’를 좋아하건 싫어하건, 왜 그토록 유교라는 말을 자주 사용하는 것일까?

일단 유교는 현대 한국 혹은 동아시아를 정교하게 설명할 능력은 없지만 그래도 기를 쓰고 설명하고 싶을 때 유용하다. 현재 한국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문제들을 도맷값으로 떠넘길 때 유용하다. 유교 때문에 이 모양 이 꼴이 되고 말았어! 그뿐이랴. 현재 한국 사회의 성취를 설명할 때도 유용하다. 유교가 있었기에 이 나라가 발전할 수 있었어! 실로 유교라는 단어가 없었더라면, 큰일 날 뻔했다. 자칫 아무것도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들킬 뻔했으니까. 유교라는 말이 느슨하게 사용되느니만큼, 유교는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 식으로 다양한 맥락에 대충 들어맞는다. 하나의 단어를 외어서 그토록 여러 맥락에 쓸 수 있다면, 사용자는 여러 가지 복잡한 용어를 학습해야 하는 수고를 덜게 된다. “우왕”이라는 한마디 말로 음식도 주문하고, 사랑도 고백하고, 연설도 할 수 있다면, 사람들은 여기저기서 우왕거리고 있지 않겠는가.

그러나 하나의 단어가 너무 많은 것을 의미할 때, 그 단어는 유용한 동시에 무용하다. 결국 ‘유교’라는 말이 무엇을 지칭하는지 도대체 모르게 되어 버리는 상황에 이르고 마는 것이다. 그러한 상황에 일조하는 요인 중 하나는, 사람들이 시대에 따라 달라지는 말의 의미에 종종 둔감하다는 사실이다. 이를테면, <논어>에 나오는 유(儒)라는 말은 후대에서 유교를 운위할 때 말하는 유(儒)와는 다르다. <논어>에는 공자가 자하(子夏)에게 너는 군자유가 되지 소인유가 되지 말라고 말하는 대목이 나온다.(女爲君子儒, 無爲小人儒) 그 대목에서 사용된 유(儒)라는 말은 오늘날 말하는 ‘유교’와는 크게 다르다. 그것은 특정 식자층을 가리키는 말이지 특정 종교나 사상의 추종자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다.

<논어>에 나오는 유(儒)라는 말은 유교의 영어 번역어로 채택되곤 하는 ‘컨퓨셔니즘’(Confucianism)이라는 말과도 차이가 있다. 역사학자 라이어널 젠슨은 <매뉴팩처링 컨퓨셔니즘>(Manufacturing Confucianism)이라는 저서에서, 우리가 아는 컨퓨셔니즘은 제수이트회 선교사들에 의해 새삼 만들어진 것이라는 취지의 주장을 한 바 있다. 그의 저서가 담고 있는 여러 주장이 얼마나 타당한지는 좀 더 따져보아야 하지만, 그의 주장은 <논어>에 나오는 유(儒)라는 말, <논어>가 고전으로 성립하던 시기의 유학(儒學)이라는 말, 현대의 유학자들이 운운하는 유교라는 말, 영어권 학자들이 사용하는 컨퓨셔니즘이라는 말들의 외연과 내포가 서로 상당히 다르다는 사실을 새삼 환기시켜 준다. 그뿐이랴. 문명 간의 비교가 성행하면서 서구에는 기독교가 있고, 중동에는 이슬람교가 있다면, 동아시아에는 그에 상응하는 유교가 있다는 식의 생각이 유행하게 되었고, 그 연장선에서 ‘유교’를 세계 종교의 하나로 간주하는 경향마저 생겨났다.

그러나 이러한 맥락들에 다 잘 들어맞는 유교의 특징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유교라는 말로 지칭하건, 유학이라는 말로 지칭하건, 컨퓨셔니즘이라는 말로 지칭하건, 그 대상은 매우 오랜 시간에 걸쳐 불균질하게 전개되어온 전통이기 때문에 시공을 넘어선 불변의 유교 본질 같은 것은 없다. 따라서 무리해서 유교의 본질을 규정하려고 들기보다는, 사람들이 어떤 때 어떤 이유로 유교라는 말을 환기하고 사용하려 드는가에 주목하는 것이 더 생산적이다. 이를테면 자신을 유학자 혹은 유학자의 후예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유교라는 상징이 영속하기를 바라 마지않기 때문에, 끊임없이 유교라는 말을 들먹일 것이다. 자신이 말하는 ‘유교’가 과거의 전통을 얼마나 충실하게 재현한 것인지는 별문제로 하면서.

비판자도 생명 연장에 공헌

자신을 유학자의 후예로 간주하는 사람들이 점차 줄어드는 와중에도 ‘유교’라는 말은 계속 재생산된다. 과거 전통을 정교하게 이해하려는 노력이 너무 번거로운 나머지 그저 편의상 ‘유교’라는 말을 사용한다. 동아시아의 전통을 먹기 좋게 포장해서 외국에 전달하고 싶은 나머지 그들의 구미에 맞게, 단순화된 의미로 ‘유교’라는 말을 사용한다. 과거의 문화와 규범을 후다닥 싸잡아 욕하고 싶은 나머지, ‘유교’라는 말을 거친 의미로 계속 사용한다. 어떤 말이 사멸하는 때는 그 말이 부정적인 함의를 갖게 될 때라기보다는, 더 이상 사용되지 않을 때이다. 유교라는 단어를 사용하며 특정 행동규범이나 문화를 비판하는 이들은, 그 특정 규범이나 문화의 사멸에 경미하게나마 공헌할지는 몰라도 유교라는 단어의 사멸에는 공헌하지 않는다. 비판을 위해서라고 할지라도, 누군가 ‘유교’라는 단어를 사용했다면, 그만큼 유교라는 단어의 생명력을 연장한 것이다. 유교라는 단어의 생명 연장에 공헌했다는 점에서는 유교의 비판자들이나 옹호자들이나 크게 다를 바 없다.

과거의 특정 문화, 전통, 혹은 텍스트를 너무 성급하게 혐오하면, 그 혐오로 인해 그 혐오의 대상을 냉정하게 이해하지 못하게 되고, 그러다 보면 결국 그 대상을 정교하게 혐오하지 못하는 결과를 낳게 된다. 마찬가지로 특정 문화를 너무 성급하게 애호하면, 그 애호로 인해 그 애호의 대상을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하게 되고, 결국 그 대상을 정교하게 애호하지 못하는 결과를 낳게 된다. 성급한 혐오와 애호 양자로부터 거리를 둔 어떤 지점에 설 때야 비로소 자신이 다루고자 하는 대상의 핵심에 한 발자국 더 다가갈 수 있지 않을까. 이 논어 에세이 시리즈가 서 있고 싶었던 지점도 그러한 지점이었다.

김영민 :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동아시아 정치사상사, 비교정치사상사 관련 연구를 해오고 있다. 저서로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가 있다. 정밀 독해와 역사적 맥락을 강조한 ‘논어 에세이’ 시즌 1(2017.9.16~2018.3.17)에 이어, 시즌 2에서는 논어에 담긴 인간과 사회에 대한 사상을 더 집중적으로 다룬다. 격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