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김영민의 논어에세이
⑨ 고전과 주석
‘논어’ 원래부터 큰 고전은 아니었어
공자 사료 여럿인데, 이상하게 집중
담은 내용 때문에 유명하다기보다
유명하기 때문에 유명한 텍스트 돼

일단 고전 되면 사람들 앞다퉈 이야기
자기 생각을 주석 형식 빌려 발표해
주석사는 단순한 고전 해설 넘어
시대 따라 달라지는 사상 보여줘
고전에 대한 주석은 시대에 따라 달라진다. 주희의 성리학은 남송대 지방 엘리트에게 이데올로기적 자양분을 제공했다. 그의 사상은 그가 새로 쓴 <논어>의 주석에 고스란히 반영돼 있다. 중국 루산산 백록동서원에 있는 주희의 동상. 위키피디아
고전에 대한 주석은 시대에 따라 달라진다. 주희의 성리학은 남송대 지방 엘리트에게 이데올로기적 자양분을 제공했다. 그의 사상은 그가 새로 쓴 <논어>의 주석에 고스란히 반영돼 있다. 중국 루산산 백록동서원에 있는 주희의 동상. 위키피디아

인류학자 마르크 오제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항상 영화관의 진짜 기적은 스크린에 나오는 인물들의 어마어마한 크기가 아닐까 생각해왔다. 스크린 속 배우들은 우리를 우리 자신보다 두배는 더 큰 거인으로 이루어진 어른들의 세계에 놓인 어린아이의 시선으로 되돌려놓기 때문이다.” 실로 그렇다. 같은 영화를 본다고 해도, 방 안의 티브이에서 볼 때와 영화관에서 볼 때의 태도는 사뭇 다르다. 중간에 끄지 않기 위해서, 졸지 않기 위해서, 그리고 영화의 존재감을 좀 더 느끼기 위해서 기꺼이 영화관에 간다. 고전의 기적 역시 고전이 담고 있는 내용보다는 원래보다 어마어마하게 커진 텍스트의 존재감 그 자체가 아닐까. 그렇다면 고전은 영화관에 들어간 텍스트와도 같다. 고전은 우리 자신보다 서너배는 더 커진 거인이 되어 독자를 어린아이의 시선으로 되돌려놓는다. 독자들은 이제 고전에 대해 경배하거나 욕을 하기 시작한다. 칸영화제에서 돌아온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에 대해 관객들이 그러는 것처럼.

고전이란 무엇인가

동아시아의 대표적인 고전이라고 할 수 있는 <논어>가 원래부터 그토록 커다란 고전이었던 것은 아니다. 역사적 맥락을 중시하는 학자들은 공자에 관한 사료가 <논어> 말고도 여럿 있다는 사실을 주지시켜왔다. 많은 고전을 영어로 번역한 중국계 학자인 라우는 일찍이 공자에 관련된 가장 믿을 만한 사료로서 <논어>만큼이나 <좌전>(左傳)을 강조한 바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상하리만치 공자를 논할 때 <논어>에 집중해왔다. 그토록 관심이 집중된 텍스트인 <논어>는 사실 다양한 이들에 의해 기록된 파편들이 복잡한 과정을 거쳐 취합된 불균질한 텍스트다. 그래서 학자들은 오랫동안 <논어>의 각 부분이 서로 어떤 관계를 맺는지에 주목해왔고, 그중 어느 부분이 진짜이고 어느 부분이 가짜인지, 그리고 얼마나 다양한 종류의 <논어>들이 존재하다가 결국에는 합쳐져 현행 <논어>로 수렴되었는지 탐구해왔다. 이런 학문적 흐름에서 최근 획기적인 입장을 천명한 학자가 마이클 헌터다. 그는 공자를 논할 때 <논어> 중심성을 과감하게 탈피하고, 고대 중국의 공자 현상 전체(the “Kongzi” phenomenon in its totality)에 주목하자고 주장한다. 즉, <논어>는 공자가 등장하는 많은 고대 문헌 중 하나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현행 <논어>가 성립되기 이전 역사에 관심을 둔 이들에게 상당한 호소력을 갖는다.

동시에 기억해야 할 것은 현행 <논어>가 고전의 지위를 누리게 된 다음부터는 <논어>의 중심성 자체가 하나의 역사적 사실이 되었다는 점이다. <논어>는 어느 순간부터 그것이 담고 있는 내용 때문에 유명하다기보다는 유명하다는 사실 때문에 유명한 텍스트가 되고 만 것이다. 어쩐지 한번쯤은 읽어봐야 할 것 같은 책, 그러나 아직 읽지 않고 있는 책. 어쩐지 한권쯤은 집에 사다 놓아야 할 것 같은 책, 그러나 자기보다는 자식이 읽어주었으면 하는 책. 누구나 어느 정도는 안다고 주장하고 싶은 책, 그러나 사실 잘 알지는 못하는 책. 요컨대 고전은 그 내용이 의미심장하기에 사람들의 관심을 받기도 하지만, 사람들의 관심을 받아 유명한 책이 되었기에 의미심장한 텍스트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어떤 책이 고전의 자리를 확보하고 나면, 사람들은 앞다투어 자신의 생각을 그 책에 빗대어 이야기하거나 그 책을 풀이하는 과정에 자기 생각을 삽입하고 싶어 한다. 즉, 사람들은 자기 생각을 독립된 글을 통해 발표하기보다는 고전의 주석이라는 형식을 빌려 발표하기 원한다. 그도 그럴 것이 평소 주목받지 않던 이가 어느 날 느닷없이 자기 이야기를 한다고 해서 사람들이 경청해주겠는가. 이미 유명한 대상에 대해 의견을 제시하면 바로 그 유명한 대상 때문에라도 사람들은 그의 말을 들어줄지 모른다. 그래서 저명한 사회과학자 시다 스코치폴은 새 와인은 새 통보다는 이미 있는 통에 담는 것이 좋다고 말한 바 있다. 사람들은 대개 유명하고 익숙한 와인을 마시려 들고, 유명하고 익숙한 텍스트에 관심을 기울이고 주석을 단다. 그렇게 발전한 주석사는 단순히 고전을 해설하는 데 그치지 않고, 사람에 따라 달라지는 다양한 생각들을 담는 매개체가 된다.

사람에 따라 그리고 시대에 따라 크게 달라지는 주석을 읽다 보면, 같은 대상도 관점에 따라 얼마나 달리 보일 수 있는지 실감하게 된다. 동시에 우리 자신의 관점이 당대의 편견이나 선입견으로부터 그다지 자유롭지 못하다는 사실 역시 깨닫게 된다. 실로 세상일이란 관점에 따라 달리 보이기 마련. 우리는 지옥을 인간이나 천사의 관점에서 보는 데 익숙해 있지만, 악마의 관점에서 지옥을 본다면 지옥야말로 고향처럼 따스한 곳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인간의 관점에서 세상을 보는 데 익숙해 있지만, 개의 관점에서 인간 세상을 본다면 세상은 지금보다 더 불가해한 곳으로 보일지 모른다. 같은 호모 사피엔스인데도 어떤 인간은 자신을 가족보다도 애지중지해주고, 어떤 인간은 자신을 보신탕집에 팔거나 삶아 먹기도 하는 불가해한 세계. 누군가 지하철 선로에서 투신을 하면, 우리는 일반 시민이나 혹은 투신자의 관점에서 사태를 보는 데 익숙할 뿐 자신이 운전하던 지하철로 그 투신자를 칠 수밖에 없었던 기관사의 관점에서 사태를 바라보는 데는 익숙하지 않다.

중국 주희가 <논어>에 대해 선대 학자들과 자신의 주석을 엮어 만든 <논어집주>. 국립민속박물관 소장
중국 주희가 <논어>에 대해 선대 학자들과 자신의 주석을 엮어 만든 <논어집주>. 국립민속박물관 소장

지방 엘리트 주희가 바라본 논어

중국에서 오랫동안 고전의 지위를 누려온 <논어>의 주석사는 얼마나 다양한 관점을 통해 해석되어 왔을까? 그 관점들은 중국 역사의 변천을 과연 얼마나, 어떻게 반영하고 있을까? 중국사 전체를 통틀어 가장 획기적인 변화 중 하나는, 남송대(1127~1279)를 기점으로 시작된 특정 지방 엘리트의 성장이다. 북송대(960~1127)에만 해도 정부가 적극적으로 관직의 문호를 열었기 때문에 과거시험을 거쳐 관리가 되는 일이 그토록 어렵지만은 않았다. 그러나 남송대가 되면, 지방에서만도 경쟁률이 100 대 1 혹은 그 이상으로 심해졌다. 과거시험을 쳐서 관리가 되기란 오늘날 박사학위자가 교수직을 얻는 일, 혹은 고시생이 고시에 합격하는 일보다도 어려운 일이 된 것이다. 고등교육을 받았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그에 상응하는 보상(취업 혹은 소득)이 주어진다는 법은 없는 법. 사회경제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그 보상은 결국 수요 공급의 차원에서 결정된다. 과거시험에 합격하기가 그토록 어려워진 것은 늘어나는 수험생에 비해서 관직은 거의 늘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남송대 이후로 현대 중국이 성립하기까지 약 8세기 동안 중국은 인구 증가에도 불구하고 관리 수를 거의 늘리지 않았다. 그 긴 기간 동안 정부는 제한된 수의 관리를 가지고서 지방과 시장에 대해서 상대적으로 비개입적 태도를 유지하고, 상대적으로 낮은 세금을 부과하였다. 청나라 후기에 한명의 지방관이 담당했던 지방민은 20만~30만명 정도였다. 이런 상태라면 중앙에서 파견한 지방관이 토착민과 지방 엘리트들의 도움 없이 해당 지역을 일상적으로 통치하기는 불가능에 가깝다. 그리하여 지방관들과 해당 지방의 엘리트들은 통치의 파트너로 상호 협조 관계를 맺곤 하였다. 이때 통치에 도움을 준 지방 엘리트 상당수가 바로 과거시험 공부에도 불구하고 관리가 끝내 될 수 없었던 지식인층이었다. 이들은 관리가 됨으로써가 아니라 지방 엘리트가 됨으로써 자신들의 정치적 열망을 실현 혹은 해소해 나갔던 것이다. 이러한 지방 엘리트로서의 자의식에 이데올로기적 자양분을 제공한 것이 이른바 성리학이다. 가장 영향력 있는 성리학 이론가는 바로 그 유명한 주희였으며, 그의 사상은 그가 새로 쓴 <논어>의 주석에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다.

<논어> 팔일(八佾)편에 붙은 그러한 주석 하나를 살펴보자. 자신의 정치적 열망을 실현하기 위하여 제후들을 찾아다니던 공자는 어느 날 위(衛)나라 의(儀) 지역에 이르게 된다. 그곳 문지기가 공자를 만나고 나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대들은 공자가 관직을 잃은 것을 뭘 걱정하십니까. 천하에 도가 사라진 지 오래되었으니 하늘이 장차 공자를 목탁으로 삼을 것입니다.(天將以夫子爲木鐸)” 공자가 목탁이 된다니, 도대체 뭐가 된다는 말인가? 한나라(기원전 206~기원후 220) 때 주석가 공안국의 설명에 따르면, 여기서 목탁이란 관리가 정부에서 정한 법령이나 명령 같은 것을 반포할 때 소리를 내는 도구다. 따라서 이 구절은 공자가 그러한 법령을 만들 수 있는 관직 혹은 정치적 권력을 가지게 됨을 의미한다.(木鐸, 施政敎時所振也. 言天將命孔子制作法度, 以號令於天下也) 공안국과 같은 사람이 보기에는 세상에서 정치적 열망을 실현한다는 일은 관리가 되는 일과 불가분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성리학자 주희는 다르다. 그가 추가한 새로운 주석은, 목탁이란 도로를 따라 울리는 물건이라는 사실에 주목한다. 그리고 공자가 관직을 잃고 사방을 돌아다니며 가르침을 펴는 것을 목탁이 도로를 따라 울리는 것에 비유하였다.(天使夫子失位, 周流四方以行其敎, 如木鐸之徇于道路也) 즉, 공자는 관리가 되어 정부의 명령이나 법령을 반포할 운명이 아니라 오히려 관직을 잃었기 때문에 목탁처럼 세상을 돌아다니며 평천하(平天下)에 기여할 운명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관직이 없어도 혹은 관직이 없기에 평천하에 공헌할 수 있다는 주석은 끝내 관리가 될 수 없었던 당시 고학력 지방 엘리트들에게 상당한 호소력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남송대 이후 전개된 엘리트 정체성의 변화를 고려하지 않고는 주희의 주석이 갖는 이러한 함의와 영향력을 충분히 음미하기 어렵다.

고등교육을 받은 많은 사람들이 그에 상응하는 보상을 얻지 못하는 현상은 현대 한국에서도 일어나고 있다. 한국직업능력개발원에서 2014년 8월에 펴낸 ‘대학 및 전문대학 졸업자의 직종별 수요 추정’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 사회가 요구하는 석·박사 인력은 25만2901명이지만 실제 인력은 113만589명으로 87만7688명이 과잉인 것으로 나타났다. 그 이후로도 매해 박사 학위자는 1만명이 넘게 배출되고 있는데 그들을 수용할 직장은 증가하기는커녕 오히려 축소 일로에 있다. 이들이 갈 곳은 어디이며, 이들이 발전시킬 세계관은 무엇이며, 이들이 결국 쓸 이 사회와 고전에 대한 주석은 무엇인가.

김영민 :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동아시아 정치사상사, 비교정치사상사 관련 연구를 해오고 있다. 저서로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가 있다. 정밀 독해와 역사적 맥락을 강조한 ‘논어 에세이’ 시즌 1(2017.9.16~2018.3.17)에 이어, 시즌 2에서는 논어에 담긴 인간과 사회에 대한 사상을 더 집중적으로 다룬다. 격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