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김영민의 논어에세이
⑧ 메타시선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려면
자신을 바라보는 메타시선이 필요

인생을 두배로 살게 하지만
많은 에너지 필요한 고단한 일
자신을 끊임없이 다그쳐야 하는 삶
영화 <무산일기> 주인공 승철의 여자친구는 이렇게 말한다. “승철씨는 자기가 뭘 잘못했는지 모르죠? 그게 바로 잘못이에요.” 마치 논어에서 “잘못이 있는데도 고치지 않는 것, 그것이야말로 잘못이라고 부른다”(過而不改, 是謂過矣)라고 한 것처럼. 사진은 <무산일기>의 한 장면. 영화사 진진
영화 <무산일기> 주인공 승철의 여자친구는 이렇게 말한다. “승철씨는 자기가 뭘 잘못했는지 모르죠? 그게 바로 잘못이에요.” 마치 논어에서 “잘못이 있는데도 고치지 않는 것, 그것이야말로 잘못이라고 부른다”(過而不改, 是謂過矣)라고 한 것처럼. 사진은 <무산일기>의 한 장면. 영화사 진진
인간은 잘못을 저지르는 존재다. 따라서 인간이 잘못을 저지른다고 놀랄 필요는 없다. 잘못을 저질러도 그 잘못을 인지할 수 있을 때는 아직 희망이 있다. 잘못을 안다고 해서 잘못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같은 잘못을 반복하지 않도록 자신을 다스릴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뭘 잘못했는지조차 모르는 상태라면 절망하기에 충분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종종 어떤 말을 비수처럼 남기고 상대를 떠나버린다. 이를테면, 영화 <무산일기> 주인공 승철의 여자친구는 이렇게 말한다. “승철씨는 자기가 뭘 잘못했는지 모르죠? 그게 바로 잘못이에요.” 마치 논어에서 “잘못이 있는데도 고치지 않는 것, 그것이야말로 잘못이라고 부른다”(過而不改, 是謂過矣)라고 한 것처럼.

인간은 무지한 존재다. 따라서 인간이 뭘 잘 모른다고 놀랄 필요는 없다. 뭘 잘 모르더라도 자신의 무지를 인지할 수 있을 때는 아직 희망이 있다. 무지를 안다고 해서 자신의 무지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무지에서 벗어나고자 자신을 채근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뭘 모르는지조차 모르는 상태라면 절망하기에 충분하다. 뭘 모르는지조차 모르는 상태에서는 가짜 지식을 섬기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버나드 쇼는 말했다. 무지보다 위험한 것은 잘못 알고 있는 것이라고. 무지보다는 가짜 지식을 경계해야 한다고. 마치 논어에서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알지 못하는 것을 알지 못한다고 하는 것, 이것이 앎이다”(知之爲知之, 不知爲不知, 是知也)라고 한 것처럼.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다. 따라서 인간에게 결함이 있다고 놀랄 필요는 없다. 결함이 있더라도 자신의 결함을 인지할 수 있을 때는 아직 희망이 있다. 결함을 안다고 해서 곧 결함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결함을 보완하고자 노력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뭐가 결함인지조차 모르는 상태라면 절망하기에 충분하다. 자신의 결함을 모를 때, 사람들은 배움에 매진하기보다는, 오지랖을 통해 자신의 무지와 무능을 스스로 폭로하는 데 분주하다. 논어에서 공자가 자신은 불완전한 사람이지만, 교학(敎學)에 게으름을 부리지 않는다(爲之不厭, 誨人不倦)고 하자, 제자 공서화(公西華)가 말했다. 바로 그것이야말로 제자들이 배울 수 없는 경지입니다!(正唯弟子不能學也)

무지의 선언만으론 부족하다

자신의 잘못을 인지하려면,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려면, 무능을 넘어 배우는 일 자체에 대해 배우려면, 메타(meta) 시선이 필요하다. 공자가 극기복례(克己復禮)라고 했을 때, 거기에는 극복 대상이 된 3인칭의 자아뿐 아니라, 대상화된 자신을 바라보는 1인칭의 자아가 동시에 있다. 메타 시선을 장착한 사람은 대개 함부로 말할 수 없는 영역에 대해서는 발언을 삼가는 사람, 자신이 알 수 없는 큰 영역이 있음을 인정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무지를 선언한다고 해서 그가 곧 메타 시선을 장착한 사람인 것은 아니다. 뭔가 배울 의지가 없는 사람일수록 질문을 하자마자, 냅다 “모르겠는데요!”라고 대꾸하고 고개를 숙여 버린다. 무지를 선언하는 데는 나름의 쾌감이 따르므로. 그러나 과연 무엇을 모르는가.

메타 시선이 있는 이는 무지를 그저 선언하기보다, 질문한다. 논어 속의 공자는 제자들 질문에 답하는 사람이기도 하지만, 질문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공자는 묘당에 들어가면 매사를 물었다.(子入太廟, 每事問) 늘 그렇듯, 인기를 끄는 이에게는 시기와 험담을 하는 이들이 생겨나기 마련. 사람들은 말한다. “누가 공자보고 예를 안다고 했나? 매사에 묻기만 하는데.”(孰謂?人之子知禮乎, 入大廟, 每事問) 그러자, 공자는 말한다. “그렇게 묻는 것이 예이다.”(是禮也)

정교한 질문은, 무엇을 모르는지 아는 사람이나 할 수 있는 훈련된 행위이며, 대상을 메타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을 때나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잘 외워 받아쓰기하듯 척척 행하는 것이 곧 예를 아는 일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기에, 척척 행동하는 대신 오히려 질문을 일삼는 공자를 비웃는다. “누가 공자보고 예를 안다고 했나?” 그러나 공자는 질문한다. 몰라도 아는 척을 하거나, 알아도 침묵하거나, 아는 것을 가지고 ‘꼰대질’을 하는 대신, 질문하기를 선택한다.

이러한 태도는 신으로부터 복을 갈구하기 위해 예식을 일삼던 이들의 자세와 사뭇 다르다. 공자의 시대 이전에는, 그리고 공자의 시대에도, 심지어 공자의 시대 이후에도, 오랫동안 ‘안다는 것’은 인간사를 좌우하는 귀신의 뜻을 알아채는 것을 의미하곤 하였다. 그러나 제자 번지가 안다는 것에 대해 물었을 때, 공자는 “사람 세계의 합당함에 힘쓰고, 귀신을 공경하되 거리를 두면 知라고 할 수 있다.”(務民之義, 敬鬼神而遠之, 可謂知矣)고 대답한다. 귀신을 덮어놓고 경배하거나 무시하는 것이, 귀신을 공경하는 동시에 멀리하는 이 절묘한 자세보다는 차라리 쉬울지 모른다. 이 절묘한 자세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대상에 대한 메타 시선, 앎의 한계와 인간 능력의 한계에 민감한 정신력이 필요하다. 그런 정신력은 제자 자로가 죽음에 대해 물었을 때, 삶도 아직 모르겠는데, 죽음을 어찌 알겠느냐(未知生, 焉知死)라고 대답한 데에서도 드러난다. 자아 수양에 필수적인 이러한 정신력은 급변하는 시대 속에서 기존의 예가 더 이상 당연시되지 않을 때, 기복신앙에 의존해서만은 더 이상 사회질서를 유지하기 힘들 때, 특히 필요하다.

메타 시선은 인생을 두 배로 살게 한다. 여행을 하는 동시에 여행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여행 체험을 곱절로 만들듯이. 행복한 삶을 누리는 동시에 행복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행복감을 곱절로 만들듯이. 그러나 메타 시선을 유지하는 일은 많은 심리적, 육체적 에너지를 필요로 하는 고단한 일이기도 하다. 송나라 때 논어 주석가인 형병은 극기복례의 과정을 전쟁에 비유하기까지 하였다. “욕심과 예의가 전쟁을 할 때, 예의가 욕심을 이기게끔 하면, 자신은 예로 돌아갈 수 있다.”(嗜慾與禮義戰, 使禮義勝其嗜慾, 身得歸復於禮) 자신을 끊임없이 다그쳐야 하는 전쟁 같은 삶. 삶은 고단하기에, 때로 죽음은 해방감을 가져온다.

공자의 제자 증자는 “맡은 바가 무거운데 갈 길은 멀다. 인을 자기가 맡은 바로 삼으니 무겁지 아니한가? 죽고 난 뒤에야 그치는 일이니, 멀지 아니한가?”(任重而道遠, 仁以爲己任, 不亦重乎. 死而後已, 不亦遠乎)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러던 증자는 죽음이 다가오자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지금부터 나는 (삶의 고단한 책임을) 면하게 됨을 알겠도다!”(今而後,吾知免夫) 아, 개운해. 이제 나는 더 이상 자기반성으로 점철된 고단한 삶을 살지 않아도 돼! 그런데 이 마지막 순간에서마저도 증자는 메타 시선을 유지한다. “나는 이제 삶의 책임과 걱정을 면한다!”(吾免夫)고 기뻐 날뛰는 것이 아니라 “나는 이제 삶의 책임과 걱정을 면함을 ‘안다’”(吾‘知’免夫)고 말한다. 즉 삶의 긴장, 구속, 고단함을 면한다는 단순한 선언이 아니라, 그 사실 자체를 메타 시선으로 바라보아 “안다”(知)는 선언이다.

공자의 제자인 증자의 초상화. 증자는 “맡은 바가 무거운데 갈 길은 멀다. 인을 자기가 맡은 바로 삼으니 무겁지 아니한가? 죽고 난 뒤에야 그치는 일이니, 멀지 아니한가”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러던 증자는 죽음이 다가오자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지금부터 나는 (삶의 고단한 책임을) 면하게 됨을 알겠도다!” 위키피디아
공자의 제자인 증자의 초상화. 증자는 “맡은 바가 무거운데 갈 길은 멀다. 인을 자기가 맡은 바로 삼으니 무겁지 아니한가? 죽고 난 뒤에야 그치는 일이니, 멀지 아니한가”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러던 증자는 죽음이 다가오자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지금부터 나는 (삶의 고단한 책임을) 면하게 됨을 알겠도다!” 위키피디아

하지만 때로는 쉬어야 한다

이토록 고단한 것이 인생이기에, 인간은 때로 쉬어야 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그러한 휴식과 이완의 순간이 논어에도 있다. 타인의 인정에 목말라 있는 제자들에게 공자는 어느 날 묻는다. 사람들이 너희를 알아주면 무슨 일을 하고 싶냐고. 거창한 계획을 늘어놓는 다른 제자들과는 달리, 증점은 엉뚱하게도 소풍 계획을 늘어놓는다. “늦은 봄에, 봄옷이 다 지어지거든, 어른 대여섯 사람, 아이 예닐곱 사람과 어울려 기수(沂水)에서 목욕하고 무우(舞雩)에서 바람 쐬고, 노래 흥얼거리며 돌아오겠습니다.” 그러자 공자는 감탄하며 “나는 증점과 함께하겠다”고 선언한다. 그런데 이때 목욕하러 가는 공자의 무리를 간밤에 과음하고, 사우나에 허겁지겁 몰려가는 중년 남자들로 상상하면 안 된다. 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이때의 목욕은 수계(修?) 의식, 즉 물가에 가서 향초를 피우고 세수하고, 나쁜 기운을 없애고 행복을 기원하는 행사이다. 즉 이완의 순간에마저 공자는 예를 떠나지 않는다.

인간은 발전이나 긴장만큼이나 이완과 휴식을 열망하는 존재다. 따라서 인간이 틈만 나면 누우려고 들어도 놀랄 필요는 없다. 자신이 일중독에 빠지는 잘못을 저질러도 그 잘못을 인지할 수 있을 때는 아직 희망이 있다. 일중독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고 해서 중독이 곧 사라지는 것은 아니지만, 휴식과 이완을 찾아 나설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떻게 쉬어야 할지조차 모르는 상태라면 절망하기에 충분하다. 쉴 수 있는데도 쉬지 않는 것, 그것이야말로 잘못이라고 부른다. 아무리 쉬었어도 아직 더 쉴 수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잘 쉬어야 자아 수양도 가능하다.

이에 인간이 쉴 수 있는 가장 화끈한 방법을 소개하겠다. 그 비결은 바로, 주기적으로 인간이기를 그만두는 것이다. 어떻게? 문명의 핵심은 언어. 고도의 언어생활을 영위하기 위하여 인간이 엄청난 에너지를 쓴다는 것을 고려할 때, 인간의 언어를 포기하는 것이 인간이기를 그만두는 가장 화끈한 방법이다. 일주일에 1시간 정도는 누가 뭐라고 하든 인간의 말을 쓰지 않고 짐승의 말을 쓰는 거다. “이번 달 회계 보고를 해주세요”라고 요구하거든 이러저러해서 재정이 적자라고 피곤하게 설명하는 대신, 그냥 으르렁대는 거다. “으르렁!” “이번 달 연수 장소를 어디로 할지 비교 검토해서 보고해주세요”라고 명하거든, 수고롭게 파워포인트를 만드는 대신 그냥 짖어대는 거다. “왈왈!” 누가 맛있는 디저트를 먹고 있는데 방해하거든, 마치 물어뜯을 것처럼 저음을 내는 거다. “으르르!” 그리고 아랑곳하지 않고 디저트를 퍼먹는 거다. 누가 다가와서 남의 험담을 늘어놓거든, 꺼지라고 소리 지르는 거다. “캬오!” 세상으로부터 오는 어떤 귀찮은 자극에도 다 이렇게 으르렁, 왈왈, 으르르, 캬오로 반응하다 보면 어느덧 피곤이 스스르 풀리는 것을 느낄 것이다. 이런 이완의 시간은 일주일에 1시간이면 족하다. 너무 오래 하다가는 영원히 인간으로 돌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