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경
문화인류학자

여러 달 전의 일이다. 한 칼럼니스트가 신문에 노년의 사랑에 관한 짧은 글을 썼다. 한평생 아내를 무시하고 자기중심적으로 살아온 남자가 있었다. 어느 날 아내는 더 이상 이런 식으로 살 수 없다고, 차라리 이혼하는 게 낫겠다고 말한다. 아마 그 순간 남자는 늘 하던 대로 아내에게 화를 내고 폭력을 휘두를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대신 처음으로 자신을 돌아보고 아내의 시선으로 그들의 관계를 바라보기 시작한다. 남자는 자신의 내부에 있는 문제들을 인정한다. 그는 아내에게 자기가 바뀔 테니 기다려달라고 말한다. 10년이 지난 지금 그들은 젊은 사람들처럼 사랑한다는 문자를 주고받는 사이좋은 부부가 되어 있다.

이 글은 곧 페미니스트들의 거센 비판과 항의를 받았다. 가정폭력의 심각성을 축소하고 여성의 희생 위에서 유지되는 결혼생활을 미화한다는 것이었다. 그 칼럼니스트는 참고 살라는 말이 아니라 오히려 가정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참지 말라는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이겠지만, 그의 의도와 달리 이 글은 강남역 살인사건 이후 활활 타오르고 있었던 페미니스트들의 분노에 기름을 붓는 효과를 가져왔고, 결국 그는 공식적인 사과로 사태를 진정시켜야 했다.

한참 지난 이야기를 새삼 꺼내는 이유는 비슷한 일이 그 뒤로도 반복되고 있다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어떤 가수가, 또는 시인이, 아니면 역사학자가 성차별적인 내용의 시나 노랫말이나 칼럼을-그게 성차별적이라는 것을 미처 깨닫지 못한 채 발표한다. 그러면 눈 밝은 누군가가 그것을 발견하고 비판한다. 그리고 말에 대한 비판은 사람에 대한 공격으로 이어져서, 당사자의 위신이 완전히 실추될 때까지 계속된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과정이 당연하고 바람직한 것이라 믿는다. 이런 작은 승리들을 통해 인류가 더 나은 미래로 나아가는 것이라고 말이다. 내 생각은 다르다. 나는 이런 사건들이 공론장이 퇴보하고 있다는 징후가 아닌지 의심한다.

공적인 토론은 사람과 의견의 분리를 전제한다. 우리는 어떤 문제에 대해 이런저런 의견을 가질 수 있다. 때로는 특정한 의견을 고집한 나머지 주위 사람들과 심하게 대립하기도 한다. 하지만 의견과 우리의 관계는 잠정적이다. 내가 어떤 의견을 갖는 이유는 그 의견이 적어도 내 눈에는 가장 그럴듯하게 보이기 때문이다. 그 의견이 잘못이라고 판단하는 순간, 나는 그것을 버리고 다른 의견을 가질 것이다. 이 말은 잘못된 의견을 갖는 것은 잘못이 아니라는 뜻이다. 사유의 과정은 필연적으로 오류를 내포한다. 오류의 가능성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사유 자체가 불가능하다. 토론의 목표는 결국 의견을 바꾸기 위함이 아니겠는가? 만일 의견을 바꿀 때마다 사과를 해야 한다면 의견을 바꾸는 일이(또는 의견이 바뀌었음을 시인하는 일이) 더욱 어려워지지 않을까?

물론 의견에도 여러 종류가 있고, 그중에는 검토할 가치가 없는 편견들도 있다. 성차별적이거나 인종차별적인 생각을 다른 의견들과 동등하게 다룰 수는 없다. 하지만 그 경우에도 그런 편견을 지닌 사람을 인격 자체에 문제가 있다는 듯 몰아붙이는 것은 잘못이다. 이는 역설적이지만, 편견의 형성이나 전파에 있어서 그 사람이 수행하는 역할을 지나치게 과대평가하는 것이다. 의견을 만드는 것은 우리가 아니다. 오히려 의견들이 우리를 만든다고 말하는 편이 정확할 것이다. 의견들은 어딘가 다른 곳에서 만들어져서, 원치 않아도 우리 안으로 스며들며, 우리의 사고와 행동과 습관을 물들인다. 나쁜 의견들-성차별적 관념을 포함해서-과 효과적으로 싸우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의견과 사람을 구별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