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에르 부르디외와 한국사회> 홍성민 지음, 살림 펴냄, 2004년
<피에르 부르디외와 한국사회> 홍성민 지음, 살림 펴냄, 2004년
대딩 선배들이 말하는 내 전공, 이 책
6. 문화예술계열
문화기획은 어떤 학문이라고 말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법학, 사회과학, 철학, 신문방송학(커뮤니케이션학)처럼 오랜 논쟁과 연구를 축적해오며 그 결과물들을 정리해낸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짧은 지면에 문화를 기획하는 방법을 담은 책을 소개하기도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런 책이 있는지도 모르겠고요. 그래서 저는 문화기획에서 ‘기획’하는 문화라는 것에 관해서 이야기해보고자 합니다. 문화가 무엇인지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그것을 기획할 수는 없고, 또 해서도 안 되기 때문입니다.

문화를 말할 때 ‘문화자본’이라는 개념을 통해 꽤 유의미한 문제를 제기한 학자가 하나 있습니다. 피에르 부르디외입니다. 그는 한국식으로 따지자면, 지방 공무원의 아들로 태어나 과외나 학원 없이 치열한 경쟁을 뚫고 명문대에 입학한 수재였습니다. 하지만 그 명문대 속 ‘있는 사람들의 문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문제의식을 갖게 됩니다. 그들은 부르디외와 다른 문화를 누리고 산 다른 사람들이었으니까요.

부르디외는 <구별짓기>를 통해 이때의 문제의식을 이론화시킵니다. 출신, 계급과 학력 같은 것들이 개인의 문화적 취향을 어떻게 정의 내리는지를 설명하죠. 쉽게 말해 한 개인이 트와이스의 ‘치어업’을 좋아할지, 아니면 모차르트의 ‘아이네 클라이네 나흐트무지크 K.525’를 좋아할지는 그의 출신과 계급, 학력 등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르디외는, 우리가 ‘취향’이라고 부르는 것이 사실은 선천적인 것이라기보다는, 개인에게 주어진 사회적인 조건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다른 계급, 다른 출신, 다른 학력의 사람들과 구분되는 취향. 부르디외는 이것을 ‘아비투스’라고 칭했습니다.

이때 등장하는 개념이 ‘문화자본’입니다. 문화자본은 아비투스를 설명하며 등장하는 개념 중 하나로, 가족에 의해 전수되거나 교육체계에 의해 생산됩니다. 말투나 몸짓처럼 몸 안에 깃든 상태로, 미술품, 책 등의 형태를 통해 대상화된 상태로, 또는 학위나 계급, 가문 등 사회적 연줄과 관계망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제도화된 상태로 우리 곁에 있었습니다.

더 많은 자본, 즉 더 많은 돈을 가진 이들일수록 더 많은 문화자본을 소유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마찬가지로 더 많은 문화자본을 가지고 있는 이들일수록, 더 많은 자본을 소유한 이들일 가능성도 높습니다. 한국 사회라고 해서 크게 달라 보이는 것은 아닙니다. 최저임금을 겨우 받으며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이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열리는 전시회를 매번 관람하는 일은 거의 불가능할 것입니다. 또 그가 매달 정기적으로 열리는 오케스트라 연주회에 참여하는 것도 어려울 것입니다.

<피에르 부르디외와 한국사회>는 부르디외의 이론을 한국 사회와 연관 지어 설명한 책입니다. 부르디외의 이론 자체가 어렵고 낯설기 때문에 쉽게 풀어쓴 이 책도 막상 쉽게 읽히지만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정말 문화를 기획하고자 한다면, 문화를 공부하고자 한다면 문화자본이란 것이 무엇인지, 아비투스라는 것은 무엇인지 알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무엇인지 모르는 것을 기획할 수는 없으며, 애써 기획해놓은 것을 즐기는 이가 누구인지 모를 수는 없는 법이니까요.

여러분도 대학에 들어간다면 일정 부분의 문화자본을 얻는 셈이 됩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이 얻게 될 문화자본을 어떻게 어떤 식으로 사용할 건가요. 저는 그 자본을 얻지 못한 사람들과 함께하는 방향으로 썼으면 좋겠습니다. 타인을 배제하고, 소외시키고, 구별짓지 않는 방향으로요. 이찬우(회대알리 교육팀장, 성공회대학교 문화기획 전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