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정희진의 어떤 메모
<인물과사상> 2016년 1월호, 한채윤 씀, 
“왜 한국 개신교는 ‘동성애'를 증오하는가”, 인물과사상사

공부에는 왕도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 사고방식을 훈련한다는 측면에서는 지름길이 있다고 생각한다. 지식이 구성되는 과정을 살펴보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인간은 양성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통념 → 양성은 다르거나 한쪽이 우월하다는 성차별 → 동성애는 비정상이라는 인식. 이 세 가지는 연결되어 있다. 이 중 한 가지만 과학이 아니라고 증명하면, 세 가지 주장은 모두 거짓이 된다. 이성애와 동성애의 구별은 남녀 구별(젠더)을 전제하므로, 성별 자체를 문제 삼는다면 이성애/동성애 개념은 성립할 수 없다. 언제나 옳은 주장, 영원한 진리는 없다는 얘기다.

우리 사회에서 동성애 혐오를 주도하는 세력은 일부 개신교 집단이다. “일부”라고 쓴 것은, 모든 개신교도가 호모포비아는 아니며 동성애자 인권운동 중에서도 개신교인이 많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호모포비아는 “자연의 섭리”도 “하느님의 말씀”도 아니다. 미국의 신학자 대니얼 헬미니악 신부의 <성서가 말하는 동성애>에 따르면, 성서는 인간의 섹슈얼리티에 대해 어떠한 단정도 하고 있지 않다. 오히려 ‘룻기’의 나오미와 룻의 이야기는 동성 간의 사랑을 긍정적으로 다룬 이야기로 유명하다.

지난 20여년 동안 성 소수자 인권 운동과 이론화에 헌신해온 한채윤의 글은 동성애에 대한 논의라기보다 한국 개신교의 위기 진단이다. 개신교의 동성애 탄압은 그들의 ‘원래’ 관심사가 아니라는 얘기다. 그녀는 개신교의 동성애 혐오가 신앙 때문이 아니라 이익집단의 필요에 의한 절박한 정치적 전략이라고 분석한다. 나는 이 글을 흥미롭게 읽었는데, 동성애가 기득권 세력에 의해 선택적으로 다루어진다는 지적 외에도 이 글이 좋은 글쓰기 모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통념을 뒤엎고, 현상을 본질화하지 않으면서, 변화가 가능하다는 힘을 준다.

1998년 김대중 정부가 출범하자 반공주의가 신앙심보다 깊은 일부 개신교 입장에서는 북한과의 관계 개선이 매우 불만스러웠다. 설상가상으로 유명 목사의 공금 횡령, 기도원 비리, 대형 교회의 목사직 세습 등은 대중의 불신을 사기에 충분했다. 개신교에 대한 비호감과 사회적 신뢰 추락은 교인 감소로 이어졌다.(반면 이즈음 천주교의 신자 수는 늘어났다.) 위기의 절정은 사립학교법 개정이다. 노무현 정부가 사학의 투명성과 공공성을 위해 교계의 ‘돈줄’을 통제하는 사학 개혁을 시도하자, 이때부터 개신교는 본격적으로 동성애를 문제 삼기 시작했다.

하지만 성적 소수자 인권 운동은 개신교의 위기와 무관하게 1990년대 후반부터 착실하게 성장해왔다. 2000년, 처음 퀴어 퍼레이드를 시작했을 때 참가자는 50여명이었지만 2014년부터는 1만5천명, 3만명, 5만여명으로 해마다 급격하게 늘고 있다. 사회적 소수자 중에서도 가장 분명한 당사자성을 가진데다, 성 소수자 이슈는 인권과 다양성 옹호 차원에서 글로벌 의제가 된 지 오래다.

즉, 개신교가 동성애의 ‘해악’을 진정 걱정했다면 동성애자 인권 운동이 성장할 때부터 반대했어야 맞다. 거의 관심이 없다가 자신의 문제를 전가할 대상을 찾은 것이다. 동성애는 ‘발견’되었다. 동성애 이미지는 사회 통념에 호소하기 쉬운데다, ‘적’이 강력할수록 명분도 강해진다. 동성애는 ‘훌륭한 적’으로 만들어졌다. 적의 구성 원리는 비슷하다. ‘적’은 비리를 은폐하고 내부를 결속시킨다. 그러므로 이렇게 말해야 한다. 개신교는 동성애자를 ‘좋아하고’ 절대적으로 필요로 한다.

정희진 평화학 연구자
정희진 평화학 연구자
몇 달 전 거리에서 “자연의 섭리”를 외치며 “짐승도 그 짓은 안 합니다”라는 플래카드를 걸고 동성애 반대 서명 운동을 하는 이들을 만났다. 나는 그들에게 다가가 이렇게 말했다. “자연의 질서를 지키려면 환경운동이 먼저 아닐까요.” 실제로 “짐승도 안 하는 짓”을 하는 이들은 대부분 ‘라깡 정신분석’, ‘참나원’, ‘트랜서핑 명상센터’의 성폭력 가해자들처럼 이성애자 남성이다.

정희진 평화학 연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