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석운 ‘화려한 풍경’전]
“삶에 쫓긴 판박이 작업에 회한”
새봄 눈빛 달라진 그림들 선봬

일상 속 초점 풀린 눈빛 정면 주시
먹먹한 분위기 무표정 인물 등장

바다를 표류하다 ‘도착’한 가족은
작가의 새로운 시작 의지 표현
“우리 곁 뿌리박은 현실 그리겠다”
청담동 갤러리나우서 30일까지
<화려한 풍경>(2019) 앞에서 출품작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최석운 작가. 작가는 지난 30년간 벌여온 풍자적 작업에 대해 한계를 느끼고 지난 4년간 힘겨운 자기반성과 숙고의 시간을 거쳤다고 털어놓았다.
<화려한 풍경>(2019) 앞에서 출품작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최석운 작가. 작가는 지난 30년간 벌여온 풍자적 작업에 대해 한계를 느끼고 지난 4년간 힘겨운 자기반성과 숙고의 시간을 거쳤다고 털어놓았다.

“지난 4년 동안 작업실에서 많은 그림을 도로 지워버렸습니다. 30년 동안 삶에 쫓겨 소모적으로 판박이 같은 작업을 해왔다는 회한이 막 밀려왔어요. 날마다 붓질한 그림 보는 게 두렵고, 싫고, 부끄러웠지요.”

뜻밖의 고백처럼 들렸다. 국내 화단에서 풍자와 해학의 그림꾼으로 널리 알려진 최석운(60) 작가의 표정과 말투는 자못 비장했다. 지난 30여년 동안 사람과 동물이 뒤얽힌 유머러스한 풍자 그림을 그리면서 대중에게 친숙한 인상을 쌓았던 작가는 새봄, 달라진 그림을 들고 나타났다. “화판 앞에서 무기력하게 고민하다가 최근 들어 나름 새 작업 방향을 종잡게 됐어요. 그걸 보여드리게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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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 초 서울 청담동 갤러리 나우에서 시작한 신작전 ‘화려한 풍경’은 경기도 양평 작업실에서 4년여 동안 진중한 성찰과 고민 끝에 나온 근작들 위주로 채워졌다. 일러스트 같은 배경에 익살스러운 삶의 풍경을 담아 보여주던 얼개가 모두 바뀐 것은 아니지만, 기존 작품과는 크게 달라진 인물이 다수 등장한다. 표류를 끝내고 섬에 도착한 난민 가족의 모습을 번갈아 등장시킨 <도착> 연작, 얼싸안은 젊은 남녀를 중간에 놓고 양 끝에 나이 든 세대가 각기 서로 외면한 채 앉아 있는 풍경을 담은 <지하철>, 휴대폰카메라로 기념사진을 찍는 봄날 연인의 자태를 그린 <화려한 풍경> 등에는 표정이 없거나 싸늘하고 먹먹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인물 캐릭터들이 도드라진다.

이번 전시의 대표작 중 하나인 <도착1>. 세계적 현안이 된 난민들의 비극을 수년 전 뉴스로 접하면서 실마리를 얻어 그렸다. 무표정하지만 어딘가 불안해 보이는 그림 속 가족들의 모습은 생계와 작업을 위해 떠돌았던 자신과 가족들의 지난 나날들이 겹쳐지면서 나온 것이라고 작가는 말했다.
이번 전시의 대표작 중 하나인 <도착1>. 세계적 현안이 된 난민들의 비극을 수년 전 뉴스로 접하면서 실마리를 얻어 그렸다. 무표정하지만 어딘가 불안해 보이는 그림 속 가족들의 모습은 생계와 작업을 위해 떠돌았던 자신과 가족들의 지난 나날들이 겹쳐지면서 나온 것이라고 작가는 말했다.

그들은 일상 속에서 초점이 풀린 눈빛으로 정면을 주시한다. 얼굴마다 미묘하게 배어 나오는 불안과 허탈, 공허감이 느껴진다. 작가의 말을 빌리자면 “내가 정녕 그리고 싶은 그림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수년 동안 거듭한 끝에 나온 작품들이다. 전시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도착1>에서 짐작되듯 수년 전 뉴스로 접한 난민들의 비극은 그의 그림 틀을 바꾸는 데 중요한 실마리가 됐다. 실제로 <도착> 연작 속 가족의 얼굴은 생계와 작업을 위해 떠돌았던 작가 가족의 지난 기억과 겹쳐지면서 나온 것이라고 그는 털어놓았다. 지난 30여년 동안 급박한 전시 일정에 맞춰 전형적인 풍자 그림만 양산해온 관성을 반성하면서 그리고 싶은 그림을 찾으려는 의지를 드러내는 신작이라는 게 작가의 설명이다.

전시장 들머리에 나온 대작 <말타기>(Horse Riding). 일상에 빠져 사는 중년여성의 삶이 익살스러운 동물상과 함께 화폭에 풀려나왔다.
전시장 들머리에 나온 대작 <말타기>(Horse Riding). 일상에 빠져 사는 중년여성의 삶이 익살스러운 동물상과 함께 화폭에 풀려나왔다.

“1980년대 미대를 졸업하고 전업작가로 나서면서 당시 기성작가들이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세계에 빠져 대중의 감정과 시선은 거들떠보지 않는 게 정말 싫었어요. 대중에게 쉽게 다가가고 공감할 수 있는 작업을 하겠다고 결심했지요. 일상의 사람과 동물, 벌레를 형상화해 그들의 삶과 욕망을 담은 해학적 그림을 그리게 됐고 그게 30여년 동안 이어져왔습니다. 하지만 저 또한 생계에 쫓기면서 며칠 만에 후딱 그리는 그림에만 길들었어요. 수년 전부터 제 그림을 못 그린다는 답답함이 붓질을 멈추게 했고 이런 변화까지 이끌어낸 것이란 생각이 듭니다.”

최석운 작 <이 닦는 남자>. 크레용 느낌이 나는 오일파스텔로 그린 근작으로 삶의 표정을 날것 그대로 생생하게 담아내려는 작가의 의지가 배어 나온다.
최석운 작 <이 닦는 남자>. 크레용 느낌이 나는 오일파스텔로 그린 근작으로 삶의 표정을 날것 그대로 생생하게 담아내려는 작가의 의지가 배어 나온다.

최씨는 70~80년대 부산에서 민중미술과 궤를 함께하며 움직였던 형상미술운동 계열의 작가로 화업을 시작했다. 90년대 활발하게 활동하며 미술잡지에 유망작가로 함께 얼굴을 내밀었던 다른 동료 작가는 지금 대부분 사라졌다. 오직 형상과 이야기를 내세운 그림으로 30여년 동안 건재해온 그가 이번 전시에서 보여준 변신은 그래서 간단치 않은 의미로 다가온다. 아크릴 군상화 외에 크레용 색감이 나는 오일파스텔로 담배 피우는 여자나 돼지 안은 남자를 거칠고 질박하게 그린 드로잉풍 그림도 예사롭지 않다. 작가의 회화적 충동을 반영한 자화상 같은 그림들로, 우리 곁에 뿌리박은 현실을 그리겠다는 결기가 읽힌다. 작가는 “수년 동안 고심하면서 지금 시대의 현실 정신에 대해 나만의 원칙을 세웠다. 이제 차근차근 실행하며 작품으로 만들 일만 남았다”고 자신감을 내비쳤다. 30일까지.

글·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