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잡(雜)을 좋아한다. 글을 읽을 때도 ‘잡독’(雜讀)이고 내 글도 ‘잡문’(雜文)에 속하고 내 그림은 ‘잡다’(雜多)하다. 또한 실례의 말이지만 우리들 대부분 잡종(雜種)이다. 심지어 유신 암울한 시절엔 가까운 친구들과 ‘잡초(雜草)전’을 꾸미기도 했다. 여기 지금 쓰고 있는 칼럼도 일종의 잡기(雜記)에 속한다.

한자어 잡(雜)의 뜻은 섞이다 섞다 모으다 만나다 등이다. 한마디로 여러 가지가 섞인 것을 의미한다. 잡은 불특정 다수를 의미한다. ‘군중’일 수도 있고 ‘대중’일 수도 있다. 대체로 ‘잡’은 김수영이 ‘거대한 뿌리’에서 호명한 온갖 잡스러운 군상들이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는…’ 거대한 뿌리를 이루는 민초들이다. 그래서 우리가 그 속에서 같이 살아야 할, 공동체를 이루는 시민들이다.

우리는 대부분 여러 가지가 섞인 세상, 즉 잡스러운 세상에서 살면서 항시 잡스러움을 천한 것으로 멸시해 왔다. 예술에도 이런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특히 미술에는 ‘순수’의 외피를 입은 주류에 속하지 못한 주변부의 미술은 가차 없이 천한 것으로 취급하거나 하대해 왔다. 사회가 그러니 자연히 미술계나 그 밖의 예술계도 대부분 주변부와 잡스러움을 천시한다. 해방 후 한동안 ‘국전’파들이 중심이 돼 그 위세를 떨친 것은 우리 미술계의 뼈아픈 기억이다.

어디 그뿐이랴. 예술계의 중심세력은 흔히 지배 권력이 되어 주변부 예술계의 약자들을 함부로 가지고 놀아왔다. 한동안 예술계의 ‘갑질’과 성폭력, 성추행들은 이들 문화 권력에 의해 다반사가 되다시피 했다.

나는 나의 그림을 자주 형식에 의해서나 내용에 있어서 ‘잡다’하다고 자칭해 왔다. 무엇을 일관되게 지속하지 못하는 나의 성격 탓이기도 하지만 1980년에 창립된 ‘현실과 발언’(이하 ‘현발’)이라는 동인전을 비롯하여 ‘민중미술’이라는 미술운동에 몸담으면서 그 ‘잡다함’이 더 늘어났다.

거기에는 어쩔 수 없는 이유와 곡절이 있다. 운동적 성격을 띠면 소위 운동의 과제에 대해서 즉각적으로 대응해야 하는 일이 자주 발생한다. 고고한 표현형식이나 내용에 대해 깊은 사유를 할 여유나 필요가 없다. 생각해 보라. ‘현실과 표현’이 아니라 ‘현실과 발언’인데 ‘발언’에 무슨 여유가 넘쳐나겠는가? 즉각적이고 신속한 대응만이 이들 주어진 과제를 해결하는 방법이다.

그 당시 대다수의 ‘현발’ 회원들은 그림을 두루마리 캔버스 천에 그려, 다들 어깨에 짊어지고 전시장에 나타나곤 했다. 마치 전쟁터에 박격포를 둘러메고 나타나듯이. 이는 ‘도시와 시각’, ‘행복의 모습’, ‘6·25’ 같은 주어진 주제를 급하게 캔버스 천에 그리고 기동력을 발휘해야 했기 때문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당시 현발 회원들의 작품들은 표현형식이나 내용에 있어 그야말로 ‘잡다함’의 잔치판이었다. 좋게 얘기하자면 ‘실험정신’의 발로였다고도 할 수 있지만 스스로 미술계에서 순수와 예술지상주의의 껍데기를 갖다 버린 결과였다.

‘현발’이 창립취지문을 발표하고 창립한 지 올해로 40주년이 되는 해다. 그 당시 미술 활동의 좌표를 찾지 못해 헤매던 나에게는 이 ‘현발’의 창립이 뭔가 전환을 이룰 수 있다는 희망찬 신호였다. 다른 동인들은 모르겠으나 나에게는 하나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었다. ‘현실과 표현’을 넘어 ‘현실과 발언’이라니 그 당시 그 ‘발언’이라는 용어에 가슴 떨려 했던 게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그것은 바로 내가 또는 우리가 시작한 미술운동이 한낱 주변부가 아니라 당당히 우리의 발언을 통해 미술도 현실을 바꿀 수 있다는 자신감의 발로였기 때문이다.

“돌아보건대, 기존의 미술은 보수적이고 전통적인 것이든, 전위적이고 실험적인 것이든 유한층의 속물적인 취향에 아첨하고 있거나 또한 밖으로부터의 예술 공간을 차단하여 고답적인 관념의 유희를 고집함으로써 진정한 자기와 이웃의 현실을 소외, 격리시켜 왔고 심지어는 고립된 개인의 내면적 진실조차 제대로 발견하지 못해 왔습니다.”

이상이 ‘현발’ 동인들 가운데 평론가였던 최민, 성완경 등이 작성했던 창립취지문 중의 일부다. 이는 우리의 이웃과 격리 소외, 고립되어 있던 미술을 다시 우리 삶의 중심부로 가져오겠다는 선언이다. 이게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 아니고 무엇인가?

스스로 자신의 철학을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이라고 부른 칸트는 이렇게 말했다. 그는 코페르니쿠스가 지구와 그 밖의 혹성들이 태양의 주위를 도는 것으로 생각한 것처럼, 대상과 인식의 여러 형식들이 관찰자의 주위를 도는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우리가 인식하는 여러 대상과 여러 형식들을 두고 나와 우리가 중심이 되어 관찰하고 그에 대한 적절한 형식을 취할 수 있어야 한다.

‘잡’의 예술은 여러 가지가 모이고 섞여 예술적 형식을 취하기 때문에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기가 쉽지 않다. ‘대중’을 상대하기 때문에 만화나 영화 같은 ‘대중예술’과 이웃이다. 잡의 예술은 예술의 중심이거나 메이저 예술이 되기를 원치 않는다. 오히려 군소 예술(minor art)로서 자생한다. 예컨대 길거리벽화나 그라피티(낙서화), 재즈와 힙합이 다 이에 속한다. 또 우리 사회의 독특한 저항미술인 ‘민중미술’ 속에 포함되긴 하지만 그 전체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잡’에는 항상 그리고 많은 삶의 서사가 깔려 있다. 그래서 ‘잡’의 예술은 현실을 반영하고 우리들 삶에 적절한 감정을 제공함으로써 ‘삶의 예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잡의 예술은 서로 섞이는 성질로 인해 독자적이거나 고립된 채로 만들어지는 작품의 성공과 실패에 연연하지 않는다.

중심이 잡스러워지긴 보통 힘든 일이 아니다. 그러나 잡스러움이나 주변부가 중심이 되는 일은 그야말로 마음먹기에 달린 일이다. ‘잡’은 언제나 어디에서나 섞이고 스며들어 그래서 누구와라도 어울리기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잡’에는 차이는 있을지언정 차별은 없다. 섞여 있는데 누가 누구를 차별한단 말인가? 차이를 잘 비비면 먹을 만한 명품 ‘전주비빔밥’도 나오는 법이다. 또한 사회가 다양해질수록 ‘잡’(섞임)은 더 중요해진다. 때에 따라서는 그들은 지배 권력에 대항해 우리가 겪었던 광화문 광장의 ‘촛불시민혁명’처럼 세상을 바꾸기도 한다.

‘잡의 예술’은 성공은 못 하더라도 결코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들은 카잔차키스가 일러준 대로 이미 그들의 묘비명을 써 두었는지 모른다.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 그래서 ‘잡’은 자유스러운 상상력으로 새로운 것을 만들고 시궁창에서도 꽃을 피워야 하는 것이다. 밟힐수록 일어나 꽃을 피우는 질경이처럼.

김정헌 ㅣ 화가, 4·16재단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