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요조의 요즘은
찾아가는 의사 홍종원

군복무 마친 뒤 수련의 밟지 않고
시민사회운동·지역사회의학 연구

서울 강북구 번동에 ‘건강의집’ 열어
직접 거주하며 동네 사랑방처럼 운영
2주·한달 주기로 중증환자 방문진료
고공농성 하는 해고노동자 찾아가기도

“방문진료의 장점은 거동 불편한 환자
대리 처방 하지 않고 직접 치료하는 것
가정환경 파악해 입체적 진료도 가능”

“‘고맙다’는 말 들을 때 감사한 마음
아픈 삶을 곁에서 지키는 게 내 역할”
서울 강북구 번동에서 방문진료클리닉 ‘건강의집의원’을 운영하는 의사 홍종원씨는 “이제서야 ‘방문의료 하는 의사’라고 스스로를 소개하는 일이 겨우 가능해졌다”고 했다. 구체적 계획이 있다기보다는 그저 부딪치며 한발씩 내디뎌왔기 때문이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서울 강북구 번동에서 방문진료클리닉 ‘건강의집의원’을 운영하는 의사 홍종원씨는 “이제서야 ‘방문의료 하는 의사’라고 스스로를 소개하는 일이 겨우 가능해졌다”고 했다. 구체적 계획이 있다기보다는 그저 부딪치며 한발씩 내디뎌왔기 때문이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2004년에 개봉했던 수많은 영화 가운데 <어디선가 누군가에 무슨 일이 생기면 틀림없이 나타난다 홍반장>(이하 홍반장)이라는 유난히 긴 제목의 영화가 있었다. 가수이자 배우인 엄정화, 그리고 지금은 고인이 된 배우 김주혁 주연의 로맨틱 코미디 영화인 <홍반장>은 대단한 흥행을 하지는 않았지만 든든한 사랑을 받았던 영화다. 영화의 배경은 어떤 해변가 작은 동네. 거기서 김주혁은 홍두식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지만 동네 사람들은 그를 ‘홍반장'이라고 불렀다. 홍반장은 편의점, 복덕방, 중국집, 정육점… 그러니까 그 동네의 거의 모든 곳에 관여했다. 그리고 그 마을 안에서 어디선가 누군가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틀림없이 나타나는 사람이었다.

한동안 까맣게 잊고 있었던 그 영화가 다시 떠오른 것은 한 의사 때문이었다. 그는 서울 강북구 번동에 살았다. 창고로 쓰이던 공간을 임대해 동네 사랑방처럼 꾸며놓고 ‘건강의집'이라는 묘한 간판을 단 뒤, 스스로 안쪽 방에 거주했다. ‘건강의집'에는 동네 주민들이 편하게 드나들었는데 그는 그들과 밥을 해 먹기도 하고, 우쿨렐레를 연주하며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간단한 몸의 이상 증세에 관해 동네 주민이 하소연해올 때마다 친절하게 설명을 해주다가도 근처 이발소 아저씨의 호출에 달려가 핸드폰을 수리해주고, 거동이 불편한 할머니를 직접 큰 병원에 모셔다 드리기도 했단다. 영화 속에나 존재하는 줄 알았던 홍반장 같은 사람이 실제로 나타났다고 생각한 순간, 놀랍게도 이 의사 역시 마침 홍씨 성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번동에 틀림없이 나타나는 ‘닥홍’

그는 홍종원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동네 사람들에게 ‘닥홍’(닥터 홍의 줄임말)이라고 불렸다. ‘닥홍'이 ‘홍반장'과 다른 점은 또 있다. 그의 관심은 그가 살고 있는 작은 동네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는 의료사회운동단체인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인의협)의 회원으로 활동하며 번동 너머의 세상도 주시했다. 426일, 세계 최장기 고공농성이라는 가슴 아픈 기록을 남기고 지난 1월11일 교섭 타결을 성공으로 이끈 ‘파인텍' 소속 홍기탁(46) 금속노조 파인텍지회장과 박준호(46) 사무장의 슬프고 연약한 몸을 1년여간 지켜봐온 것도 그였다. 지난 3월, 그가 거주하며 동네 주민들을 만나는 공간인 ‘건강의집'과 동일한 이름의 방문의료클리닉 ‘건강의집의원'을 근처에 개원하고 의사 김창오, 간호사 이지혜와 함께 장애인 가정방문 의사 역할까지 맡고 있는 ‘닥홍', 의사 홍종원(32)을 지난 7일 서울 번동 ‘건강의집의원'에서 만났다.

―고공농성 하시는 두분을 진료하신다는 기사를 통해 선생님을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겨울에 시작한 일이었는데 끝난 시점도 겨울이었죠. (서울 양천구 목동 열병합발전소) 탑이 너무 높아서 (75m) 크레인으로 올라갈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직접 굴뚝에 부착된 사다리를 하나하나 밟고 올라가야 했는데 막상 가보니까 상상을 초월하는 높이에 좀 무서웠습니다. 늘 다른 분과 함께 올라가서 그 티도 못냈습니다.(웃음) 몇 개월에 한번씩 총 6번 정도 올랐던 것 같아요. 처음에는 참 비장했습니다. 어떻게 허물없이 교감할 수 있을까 걱정도 많이 되었고요. 그런데 계속 올라가면서는 조금씩 익숙해지고, 요령이라는 게 생기기도 하고, 자연스럽게 가까워졌어요. 마지막에는 한해를 같이 살아낸 느낌 같은 것을 받았습니다. 종국에는 타협이 되어 정말 다행이에요.”

2014년 408일이라는 긴 시간의 고공농성 끝에 이루어낸 남은 노동자들의 고용 보장, 노동조합 활동 보장, 단체협약 체결 등의 합의가 여전히 이행되지 않아 2017년 다시 오른 굴뚝이었다. 408일이라는 전적을 아프게 넘으며 싸움을 이어가던 그곳에 홍종원은 ‘건강한 사람이 올라갔으면 한다'는 인의협의 제안을 받고 올랐다고 말했다. 나는 목동 열병합발전소 굴뚝을 오르던 홍종원과 일행의 사진을 인터넷으로 찾아보았다. 그들 중 누가 홍종원인지 도저히 알아볼 수 없었다. 그들이 모두 개미만큼 작았기 때문이었다.

―서울 강남역 사거리 교통 폐회로텔레비전(CCTV) 철탑에 올라 투쟁하는 삼성해고노동자 김용희(60)씨도 찾아뵈었죠.

“김용희씨는 지난 6월10일부터 철탑 위에 머물고 있어요. 가서 보니까 파인텍 농성 장소였던 목동보다 현장 조건이 훨씬 열악하더라고요. 높이 25m, 한평도 되지 않는 공간에 다리를 쭉 펴지도 못하고 그냥 쪼그려 앉을 수 있는 구조예요. 그럼에도 처음에는 김용희씨와 이런저런 이야기도 많이 나누고 여유가 있어 보였달까, 그랬는데 나중에 단식을 시도하시고 나서는 진료도 거부하고…. 지금은 다행히 다시 복식하시고 있습니다. 무척 조마조마하고 안타까운 마음이지만 인생을 바쳐 투쟁하는 그 마음을 제가 온전히 헤아릴 수는 없을 거예요.”

1991년 노조를 만들었다는 이유로 삼성항공(삼성테크윈)에서 해고된 이후 20년 넘게 투쟁해온 김용희씨는 삼성의 사과와 명예복직을 요구하며 지금 이 순간에도 철탑 위를 지키고 있다. 지난 17일, 그가 철탑에 오른 지 100일이 됐다.

의대 졸업자 3000명 중 20명 인의협 가입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는 어떤 단체인지요?

“인의협은 1987년에 만들어진 단체입니다. 민주화에 대한 열망이 강렬했던 그 시절 노동자들의 건강 문제랄지 국가 차원의 의료보건정책들에 깊게 관여하고자 하는 의사들이 만든 단체예요. 노숙인이나 쪽방촌 사람들, 이주노동자 같은 소외계층을 진료하고 모든 사람의 건강권을 수호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단체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인의협 선생님들을 처음 뵌 게 2008년도 ‘태안 기름유출 사건’ 봉사활동 때였어요. 그때 의대생이었는데, 태안의 문제에 관심이 많아 찾아갔다가 처음 연을 맺게 되었습니다.”

―그때 어떤 느낌을 받으셨나요?

“멋있었어요. 제가 아직 의료인들의 사회적 활동에 대해 잘 몰랐던 때였거든요. 처음 그런 모습을 직접 본 건데, 대단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저도 그들처럼 활동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 뒤로 학교를 졸업하고 회원이 됐으니까 벌써 10년이 넘었네요.”

―인의협 누리집을 보니 매년 의대생을 대상으로 캠프사업을 하며 인의협의 활동을 홍보하는 것 같더라고요. 옛날에 선생님이 그랬듯이 이 단체에 관심을 갖는 학생이 많이 있나요?

“안타깝게도 관심을 갖는 학생은 매우 적습니다. 한해에 3000명 정도의 의사가 배출되는데 그중에 인의협에 가입할 법한 사람은 20명도 되지 않을 것 같아요. 아무래도 정치적으로 보수적인, 의사라는 집단의 특성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가치관이 다른 사람도 있을 것이고요.”

―인의협에 대한 마음이 각별하실 것 같습니다.

“사실은 인의협 구성원도 저마다 생각과 가치관이 조금씩 다릅니다. 저 역시 개인적으로 관심이 있는 일은 제가 사는 지역에서 할 수 있는 활동들이에요. 다만 세상에는 함께 연대해야 하는 거대한 싸움들도 있으니까요. 예컨대 제주의 영리병원을 막아내는 싸움이나, 낙태죄 폐지 운동 같은 것들. 최근에는 ‘인보사’라는 무릎관절염을 치료하는 주사의 충분히 검증되지 않은 안전성 때문에 고통받고 있는 피해자들을 위해 활동하고 있습니다. 지역에서 제가 하고 있는 일도, 인의협 활동도 모두 한국 사회를 건강하게 하는 데 기여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소속 의사 홍종원(셋째)씨가 한의사 오춘상씨, 국가인권위원회 사무총장 조영선씨와 함께 2018년 1월14일 서울 양천구 목동 열병합발전소 굴뚝에 무사히 오르고 있다. 이들은 고공농성 중인 파인텍 해고노동자 홍기탁씨와 박준호씨를 만나러 가는 길이다.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소속 의사 홍종원(셋째)씨가 한의사 오춘상씨, 국가인권위원회 사무총장 조영선씨와 함께 2018년 1월14일 서울 양천구 목동 열병합발전소 굴뚝에 무사히 오르고 있다. 이들은 고공농성 중인 파인텍 해고노동자 홍기탁씨와 박준호씨를 만나러 가는 길이다.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독거노인 방문진료 돕다가 마을공동체로

홍종원은 2011년 가톨릭관동대 의대를 졸업하고 보건지소의 공중보건의사로 군복무를 하며 성공회대학교 엔지오(NGO)대학원에서 ‘시민사회운동'을 공부했다. 또한 의대 졸업반 때 네팔 동부 부탄난민촌 지역병원에서 실습했던 인연으로 2015년 10월에는 극심한 지진 피해를 입은 네팔로 진료활동을 다녀왔다. 2016년부터는 가톨릭관동의대 예방의학교실에서 지역사회의학 연구를 병행하고 있다.

“좀 생소하죠. 저는 흔히 무슨 과 의사, 라고 보통 말하는 임상전문의는 아닙니다. 의료 전문가로서의 활동뿐만 아니라 지역사회의 변화를 위해 좀 다른 방식으로, 시민운동적 측면에서 의사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을까 고민해오다 이 길을 걷게 되었어요.”

―특별한 계기가 있나요?

“그저 저에게는 의사로서 정규 과정에 편입되는 것보다 자유롭게 사는 게 더 중요한 일이었어요. 그렇다고 이렇게 사는 것이 더 가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오히려 제겐 사회적으로 정해진 길을 가는 게 더 힘들고 어려운 일이거든요. 그 정해진 길을 묵묵히 가는 삶도 정말 훌륭하다고 생각합니다.”

―번동과의 인연은 어떻게 시작됐나요?

“‘건강의집의원’에서 함께 일하는 김창오 선생님의 영향이 큽니다. 2008년께 엔지오단체를 만들어서 강북구 지역의 독거노인들을 방문진료 하는 의료활동을 하고 있었는데, 그때 우연히 돕게 되었어요. 그때 인연을 맺은 뒤로 제가 선생님을 졸졸 따라다녔어요.”(웃음)

주민이 주도해 마을에 필요한 사업을 직접 계획하는 ‘서울시 마을공동체 사업’이 시작된 2012년, 서울 강북구 보건소에서 관리의사로 근무 중이었던 김창오(44)는 병·의원과 약국이 없고 저소득층과 독거노인, 장애인의 비율이 높은 번동148 마을을 건강마을로 만들겠다는 사업을 기획했다. 그는 보건소 소속 의사로 일하며 지역 건강 증진을 위해 할 수 있는 공공보건의 역할을 오래 고민해왔다. 같은 비전을 가졌던 홍종원 역시 김창오를 따라 번동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2014년에는 아예 번동으로 거주지를 옮겼다.

“공중보건의가 끝났을 때였는데, 대학교의 수련의로 들어가는 게 일반적이거든요. 그런데 저는 그렇게 하지 않았어요. 다소 임상의사로서의 전문성이 떨어지더라도 내가 바라던 생활, 지역에서 사람들과 함께 어울리는 걸 해보는 게 더 맞겠다고 생각했어요.”

그가 머무는 ‘건강의집'은 그렇게 탄생했다. 그곳은 동네 주민뿐 아니라 구청, 보건소, 지역아동센터, 지역청년단체 등 지역의 여러 자원이 결합하는 거점의 구실을 했다. 홍종원은 “거기서 별걸 다 했다”며 웃었다. 주말 가족 건강놀이터 ‘선데이파크', 청소년 교육 ‘일상연구소 말랑말랑', 건강울타리네트워크 ‘건강삶터네', 오패산 마을 축제 ‘숲속애', 그 외에도 다양한 주민 소모임이 ‘건강의집'에서 이루어졌다.

“가정 방문 하며 다시 배우는 기분”

북적대는 사랑방 ‘건강의집'을 거쳐 홍종원은 김창오와 함께 ‘건강의집의원’을 지난 3월 개원했다. 이곳은 장애인 방문진료 전문 의원이다. 1960, 70년대까지 활발했던 왕진제도는 병원 안 진료를 기본으로 하는 것으로 의료법이 개정되면서 점차 사라졌다. 하지만 급속한 인구 고령화와 의료 사각지대 해소에 대한 요구로 다시 필요성이 커지고 있다. 역시 빠른 속도로 고령화가 진행된 일본은 2000년대 중반부터 방문 진료를 활성화했다.

“우리나라도 지난해 9월 중증장애인을 대상으로 하는 방문 진료가 법으로 허용이 됐어요. 이분들은 이동이 불편하니까 예방적 차원의 건강관리가 필요하다고 보고, 그냥 일시적 왕진이 아니라 주기적으로 만성질환 관리를 하는 것이 가능할 수 있도록 제도화된 거죠. 2007년부터 보건소에 있으면서 제한적으로 방문 의료 활동을 해온 김창오 선생님께서 이 제도가 생기자, 아예 전문 의료기관을 만들어보자 제안했어요.”

―방문 진료는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지나요?

“장애인복지관, 종합사회복지관, 보건소, 동주민센터 및 요양센터 등에서 거동이 불편한 환자를 진료 의뢰하거나 혹은 동네 주민들이 소개합니다. 처음엔 담당 사회복지사나 공무원과 함께 찾아뵙고 대상자의 상태를 파악해요. 방문 진료가 필요하다고 판단되면 짧으면 2주, 길게는 한달 주기로 찾아가 건강관리를 함께 해나가죠.”

―방문 진료의 장점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요?

“보통 거동이 불편한 환자는 보호자가 병원에 대신 방문해 환자 상태를 설명하고 대리 처방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의사가 직접 집으로 찾아가면 환자 상태를 바로 확인하고 치료하는 게 가능해지죠. 그뿐만 아니라 환자가 의사의 공간으로 오는 것과 의사가 환자의 집으로 가는 것은 제법 큰 차이가 있어요. 집은 누군가의 건강 상태를 가장 정확히 설명해 줄 수 있는 공간이기도 하거든요. 의사의 공간에서 환자의 설명과 검사 결과만으로 건강 상태를 파악하는 게 아니라 가정 환경과 사회적 환경까지 파악하고 진료를 한다면 좀 더 입체적으로 환자를 파악할 수 있습니다. 의사와 환자가 더욱 친밀한 관계를 맺는 것도 가능할 것이고요.”

―아직 시행 초기라서 방문 진료라는 게 환자도 그렇지만 의사의 입장에서도 낯설 것 같아요.

“그렇죠. 보통은 다들 의사가 주인인 공간에서 진료받는 것을 익숙해하기 때문에 의사가 방문하는 진료가 아직은 비일반적이죠. 그래도 직접 찾아가 본다는 게 참 귀한 경험 같아요. 번동에 장애인구가 많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집에 방문하고 나서야 제가 아직도 모르는 게 많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번동이랑 인연을 맺은 게 2012년부터지만, 가정 방문을 하면서 다시 배우고 있는 기분이에요.”

―선생님은 의사라는 직업을 약간 수단으로 생각한다는 느낌을 받아요. 보통 의사라는 직업은 목적이 되는 직업이잖아요. 어른들이 나중에 커서 훌륭한 사람이 되라고 말할 때 그 ‘훌륭한 사람’의 은유에 들어가는 직업이고, 모두가 선망하고요. 그런데 선생님은 정말 하고 싶은 다른 일을 위해서 의사라는 직업을 그저 수단으로 취하시는 것 같아요.

“어느 정도 맞는 말이기도 합니다. 의사로서 할 수 있는 일은 사고가 일어나거나 질병이 생겼을 때 그것을 치료하는 일, 당장의 병을 고치고 약을 조제하는 일이고 그것은 물론 꼭 필요한 일입니다. 하지만 결국 모두 다 같이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할 때 소위 의사들이 하는 진료실과 병원에서의 처치는 어떨 땐 수단이 되기도 하는 거니까요.”

서울 강북구 번동에서 가정방문진료 전문 병원인 ‘건강의집의원’을 운영하고 있는 의사 홍종원.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서울 강북구 번동에서 가정방문진료 전문 병원인 ‘건강의집의원’을 운영하고 있는 의사 홍종원.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홍종원 ‘히어로’를 흉내 내고 싶은 아이들

―가장 많이 하는 일이 ‘듣는 일’이라고 다른 인터뷰에서 말씀하시던데요. 어떤 말을 들을 때 가장 좋은가요?

“(오랜 침묵) 솔직히, ‘고맙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가 제일 좋죠. 장애, 채무, 해고, 가족의 해체 등 개인의 잘못도 있지만 사회문제가 겹쳐 소외된 분들을 많이 만나는데요. 그저 의료인의 역할을 할 뿐인데도 그분들은 찾아온 것만으로도 고맙다고 하세요. 그때마다 정말 그분들께 감사한 마음이 듭니다. 어떻게 보면 아픔을 갖고 살아가는 삶을 곁에서 바라봐주는 것이 제 역할의 전부 같아요.”

함께 일하는 동료 김창오를 비롯해 대학 시절 지도교수(가톨릭관동의대 예방의학교실 박웅섭 교수)와 인의협 회원들까지, 살면서 만나온 여러 좋은 의사들을 운이 좋게도 흉내 낼 수 있어서 지금에 왔다는 그에게 ‘홍종원을 흉내 내고 싶어 하는 사람도 있지 않을까’라고 물었다. 그는 무척 난처해했다.

“이제서야 ‘방문진료 하는 의사’라고 스스로를 소개하는 일이 겨우 가능해졌는걸요. 예전에는 ‘건강의집'이나 제가 하는 일들에 대한 설명조차 힘들었어요.”

인터뷰를 준비하면서 그가 출연했던 몇년 전 방송(<티브이엔>(tvN)의 <리틀빅히어로>)을 보았다. 그는 거기서 별 말 없이 자신이 평소 하던 일을 했다. 함께 지내는 동료인 진우씨가 걸출하게 노래를 부를 때 옆에서 기타를 치고, 동네 할머니의 집에 찾아가 외로운 노인의 넋두리를 가만히 들어주었다. 아들의 일을 이해하지 못하는 아버지가 찾아왔을 때 눈물을 짓다가도, 친구들과 술 한잔 나누면서는 많이 웃었다. 김포 운양초등학교의 한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그 방송을 보여주었고, 방송을 본 아이들이 꼬물꼬물 팬레터를 써서 ‘건강의집'에 직접 보내왔다는 사실을 홍종원은 인터뷰를 마치고 털어놓았다. 나는 그에게 부탁해 편지들을 읽어보았다. 수연이의 편지에는 “선생님 같은 사람들이 많으면 우리나라에는 힘든 사람들이 아예 없을 것 같아요”라고 적혀 있었다. 남훈이는 “선생님은 진짜 우리나라의 히어로”라고 적었다. 영익이는 “나도 나중에 홍종원 선생님처럼 살고 싶다”고, “그리고 언젠가 꼭 만나고 싶다”고 다짐했다. 자신이 하는 일을 설명하는 것조차 어려웠다고 말하는 홍종원은 하늘을 날지도, 손에서 거미줄을 뿜지도, 근사한 망토를 두르지도 않고서 아이들의 히어로가 되어 있었다. 묵묵히 자신이 사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 그것만으로 말이다. 삐뚤빼뚤한 글씨로 적힌 문장을 어른들은 심각하게 읽지 않는다. 나도 그런 어른이지만 어쩐지 이 아이들의 편지는 그렇게 되지 않았다. 아이들의 모든 이야기에 깊이 동의했다.

‘저의 마지막 인터뷰이가 되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그가 가장 듣기 좋아한다는 ‘고맙다’는 말을 고봉밥 만들듯 꾹꾹 무겁게 만들어 헤어지기 전 그에게 건넸다. 같은 말을 당신들에게도 똑같이 건네며 이 글을 마무리할까 한다. 선물과도 같은 1년이었다. 모자란 인터뷰의 다정한 독자가 되어주셔서, 그동안 진심으로 감사했습니다.

녹취 이유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