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이런, 홀로!?
나의 ‘꾸밈노동’에 대해
고작 치장을 덜 한다고 존재감이 옅어지고 사는 재미를 잃다니, 대체 나에게 여성성은 뭐였을까? 진정 이토록 얄팍하고 번잡스러운 것을 떠받들고 살았던 걸까? 비밀 자물쇠가 걸려 있던 당신의 근간을 열어젖혔는데 그 안이 텅 비어 있다면? 여자로 태어나서 평생을 여자로 산, 나의 인생이 한 편의 사기극처럼 느껴졌다. 게티이미지뱅크
고작 치장을 덜 한다고 존재감이 옅어지고 사는 재미를 잃다니, 대체 나에게 여성성은 뭐였을까? 진정 이토록 얄팍하고 번잡스러운 것을 떠받들고 살았던 걸까? 비밀 자물쇠가 걸려 있던 당신의 근간을 열어젖혔는데 그 안이 텅 비어 있다면? 여자로 태어나서 평생을 여자로 산, 나의 인생이 한 편의 사기극처럼 느껴졌다. 게티이미지뱅크

명품과 칵테일, 남자 같은 섹스… 
‘섹스 앤 더 시티’가 그리던 
주체적인 여성상은 사라졌는데

드러그스토어가 상륙한 뒤
여성의 신체는 더욱 억압당했고
관리 대상으로 분해됐다

블러셔와 하이힐을 옷장에 묻자
결핍을 느꼈고 존재감이 옅어졌다
나에게 여성성은 무엇이었을까

K는 화려한 커리어를 자랑하는 50대 싱글 여성이었다. 그가 나에게 지시를 내리면 나는 그 지시에 따랐다. 우리가 쓴 계약서에는 그가 갑, 나는 을이라고 명시되어 있었다. 모두 다섯번 만났는데 두번째 만났을 때 그는 인사 대신 외모 품평을 늘어놨다.

말인즉, ‘지난번보다 훨씬 얼굴색이 밝고 예뻐졌는데 파운데이션 컬러를 바꿨느냐, 아니면 연애를 하느냐’는 것이었다. 그 말을 건네는 K의 어투와 표정이 너무나 친절하고 우호적이라서 나는 기분이 나쁜데도 솔직하게 반응할 수 없었다. 대신 첫 만남에서의 내 모습을 떠올려봤다. 체육관에서 운동을 하고 부스스하게 대충 말린 머리에 화장 안 한 얼굴, 그리고 무채색 점퍼 차림. 그건 치장하지 않은 날의 내 모습이었다.

그날 나는 K에 관한 몇 가지 사실을 알게 됐는데, 그가 동종 업계 남자들과 치열하게 경쟁했던 일중독자라는 것과 한껏 치장한 여성을 좋아한다는 것이었다.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K는 옷이나 헤어스타일, 화장에 흐트러짐이 없었다. 일명 ‘관리 잘된 커리어우먼’의 전형이었다.

세번째 만남을 앞두고 나는 K의 구체적이고 세분화된 채점 기준에 따라서 점수를 얻고자, 아니 낙제를 면하고자 화장하는 시간을 대폭 늘렸다. 파운데이션에 파우더를 더하고 컨실러를 더하고 하이라이터와 블러셔를 더하고 블론징을 더하고 마스카라를 더하고….

몸속까지 관리하라고?

만약에 몇년 더 일찍 K를 만났더라면 나는 그를 동경했을 것이다. 글로벌 기업에서 일하면서 거대 도시를 활보하는 코즈모폴리턴. 당당하고 유능하고 오직 나를 위해서 사는 패벌러스(fabulous) 싱글! 그렇다, K는 <섹스 앤 더 시티>의 산증인이었다.

미국 <에이치비오>(HBO)가 제작하고 1998년부터 2004년까지 방영한 드라마 <섹스 앤 더 시티>는 20대 내내 우리의 정신세계를 지배했다. 드라마 한편이 그렇게까지 영향력이 있을까 의심스럽겠지만 결코 과장이 아니다. 도시에 사는 싱글 여성 서너명이 등장하는 아류작이 쉴 새 없이 쏟아졌고, 네명의 중년 남성이 등장하는 김은숙 작가의 <신사의 품격>이라는 드라마도 전파를 탔다. <섹스 앤 더 시티>가 역사가 되어 사라진 뒤에도 그 원형은 아직도 살아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제 와서 그게 다 뭐란 말인가? 명품과 칵테일, 신어본 적은 없으나 철자를 외울 수는 있는 그 이름 마놀로블라닉(manolo blahnik·스페인 구두 브랜드), 잠들지 않는 도시, ‘남자처럼 섹스하면 상처받지 않는다’는 슬로건. ‘주체적인 여성상’ 하면 자동적으로 떠오르던 기호들은 다 사라졌다. 극장판 <섹스 앤 더 시티>에서 보여준, 네 친구의 캐릭터가 완전히 붕괴된 모습은 아무리 아름답게 포장을 해보려고 해도 역부족이었다. 그리고 그 시절을 함께했던 우리도 변했다. 또래 친구들이 하나씩 ‘시댁 앤 더 제사’를 울며 겨자 먹기로, 혹은 아무런 저항 없이 받아들였을 때 우리 모두의 청춘도 막을 내린 셈이다.

그런 이유로 K를 만날 때마다 심정이 복잡했다. 더군다나 그는 일을 밀어붙이는 타입이었다. 그는 내 기운까지 아낌없이 가져다 썼다. 그와 헤어지면 나는 응급 환자처럼 드러그스토어로 뛰어 들어갔다. 그곳의 진열대에서 나는 끝없이 나열된 상품, 상품을 뒤졌다. 독일산 각질 제거기, 손톱 크기에 맞춰서 붙이는 네일 스티커, 코 주변의 피지를 따로 제거해주는 팩, 얼굴선을 팽팽하게 당겨준다는 밴드, 다이어터들이 즐겨 먹는 곤약 젤리, 때마다 사들여야 하는 계절 필수품, 용도조차 알 수 없는 신제품. 그러다가 문득 궁금했다.

‘이것들은 모두 어디에서 왔지?’

내가 본격적으로 화장을 하고 외모를 가꾸던 2000년대 초반 무렵만 해도 여성이 관리해야 할 부위란 피부와 체형, 헤어스타일 정도가 전부였다. 그런데 몇년 뒤에 드러그스토어가 상륙하더니 여성의 거의 모든 신체 부위가 세분해서 관리해야 마땅한 무엇이 됐다. 그러니까 2018년을 사는 여성은, 기능성 크림으로 모공을 지우고 회갈색 렌즈로 눈동자 색을 신비롭게 연출하고 올해의 ‘팬톤 컬러’(미국 팬톤사에서 만든 기준 색표집)에 따라서 여름옷을 살 계획을 진지하게 세우고 있다. 심지어 ‘이너 뷰티’라는, 몸속까지 관리하라는 의미의 말장난조차 나름의 설득력을 얻었다. 이쯤 되면 진지하게 생각해볼 일이다. 누가 우리더러 지갑을 열어서 이 모든 것들을 사게 만들었는가?

한번 시작된 의문은 연쇄적으로 이어졌고 이내 머릿속을 점령했다. 그러자 길에서, 전동차와 버스 안에서 마주치는 아름다운 여성들이 이전과 다르게 보였다. 모든 연령과 성별을 통틀어서 아무도 시도하지 않는 차림새를 오직 젊은 여성들만이 고수한다. 피부를 드러내고 머리를 길게 길러서 곱슬하게 말고 뺨을 붉게 물들인다. 내가 생각하기에 그것은 임신이 가능한 여성이라는 표지다. 이런 여성이 한명 나타났을 때 주변의 공기조차 미세하게 달라지는 것을 감지할 수 있었다.

생각은 멈추지 않았다. 누구보다 아름답게 치장하고도 예닐곱살 아이 같은 말투와 애교를 보여주는 매체 속의 여성들, 화장을 했을 때는 자신을 아르바이트생으로 보던 손님들이 화장을 하지 않았더니 사장님으로 보더라는 어느 여성의 경험담, 직원들이 따라야 할 화장 매뉴얼이 정해져 있는 멀티플렉스 극장과 외식 프랜차이즈 업체. 생각이 계속 뻗어나갔다.

누군가는 말했다. “화장하고 미니스커트를 입는 페미니스트는 남자를 사랑하는 페미니스트와 함께 수용하는 것으로 70년대 미국에서 논의가 끝난 것이 아니냐”고. “이봐, 촌스럽게 왜 이래? 미모는 권력이고 치장은 자기만족이므로 절대로 비판받아서는 안 되는 성역이야!” 그러면 또 다른 목소리가 말했다. “돈과 시간과 공력을 쏟아붓는데도 너를 억압하고 결과적으로는 남성 체제에 봉사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행위를 거부하는 시늉이라도 해봐!”

결국 나는 하나의 목소리를 택했고 그 목소리를 따라갔다. 하나에 4만원쯤 하는 오르가즘이니, 딥스로트니 하는 해괴한 이름의 블러셔를 얼굴에 바르는 대신 가끔 꺼내놓고 감상했다(내다버릴 용기가 없음을 인정한다). 국외 인터넷 쇼핑몰에서 사들인 사이즈 2의 DVF(Daine Von Furstenberg·다이앤 폰 퓌르스텐베르크) 원피스, 반짝이는 하이힐을 고대 유물처럼 옷장 속에 묻었다. 대신에 나이키가 나에게 토한 것 같은 운동복 차림으로 돌아다니면서 편안함과 활동성을 얻었다. 시간과 돈, 에너지도 얻었다. 그리고 변화의 반작용으로밖에 볼 수 없는 결핍을 맛봤다.

지금까지 내가 여성성이라고 믿던 것을 전부 박탈당한 기분이었다.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이 자유로운데 마음 깊은 곳에서는 억압을 원했다. 다시 한 번 여자가 되고 싶었다. 그건 너무나 쉽고 익숙한 일이었다. 거울 앞에서 한 시간씩 화장을 하고 스타킹에 하이힐을 신고 ‘미스터 빅’을 만나러 가고 싶었다. 날씨에 비해서 춥거나 더운, 말도 안 되게 불편한 옷을 입고도 어찌된 일인지 환하게 웃던 여자, 그 여자를 추억했다.

과거로 돌아가지 않기로 했다

고작 치장을 덜 한다고 존재감이 옅어지고 사는 재미를 잃다니, 대체 나에게 여성성은 뭐였을까? 진정 이토록 얄팍하고 번잡스러운 것을 떠받들고 살았던 걸까? 비밀 자물쇠가 걸려 있던 당신의 근간을 열어젖혔는데 그 안이 텅 비어 있다면? 여자로 태어나서 평생을 여자로 산, 나의 인생이 한 편의 사기극처럼 느껴졌다.

나는 결핍을 느끼면서, 결핍을 느끼는 자신을 혐오했다. 결핍과 혐오의 수레바퀴를 돌다가 지쳐서 나가떨어졌다. 여성성이라는 것이 지겨웠고 이런 일로 기운을 빼는 것이 싫었다. 남자였다면 평생 단 한 번도 고민하지 않을 문제가 아닌가?

그래서 어떻게 수레바퀴에서 빠져나올 것인지, 묻지 말길 바란다. 나는 하나의 본보기를 찾기 위해서 부단히도 노력했지만 따라 할 만한 모델이 없었다. 오히려 여자라는 딜레마에 빠진 여자들 대부분이 자신의 세계를 끝내는 길을 선택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자살했다는 뜻이다. 나는 살기로 했고 과거로 돌아가지 않았고 나의 이야기를 쓰는 쪽을 택했다. 그래서 이 이야기는 미완인 채로 여기까지다. 오늘까지 살면서 겪은 고민과 내 나름의 결심을 여기에 남긴다. All Alon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