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이진순의 열림
고 이한빛 피디 아버지 이용관씨
“한빛이는 자기를 괴롭힌 누구에 대한 개인적인 원망이 아니라, 구조적인 문제들, 근본적인 적폐에 대해서 온몸으로 고민하다가 죽었어요. 내가 분노심에서 개인의 문제로 물고 넘어지면 일시적인 분풀이는 될 수 있을지언정 한빛 죽음의 의미를 살리는 데는 도움이 안 될 거라고 봤어요. 물론 엄마는 여전히 그 분노가 안 삭여져서 힘들어하지만요.” 지난해 드라마 <혼술남녀>(tvN)에서 조연출로 일하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고 이한빛 피디의 아버지 이용관씨와 어머니 김혜영씨가 11일 저녁 서울 도봉구 도봉동 자택에서 아들의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한빛이는 자기를 괴롭힌 누구에 대한 개인적인 원망이 아니라, 구조적인 문제들, 근본적인 적폐에 대해서 온몸으로 고민하다가 죽었어요. 내가 분노심에서 개인의 문제로 물고 넘어지면 일시적인 분풀이는 될 수 있을지언정 한빛 죽음의 의미를 살리는 데는 도움이 안 될 거라고 봤어요. 물론 엄마는 여전히 그 분노가 안 삭여져서 힘들어하지만요.” 지난해 드라마 <혼술남녀>(tvN)에서 조연출로 일하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고 이한빛 피디의 아버지 이용관씨와 어머니 김혜영씨가 11일 저녁 서울 도봉구 도봉동 자택에서 아들의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유튜브 영상 속에서 그를 보았다. 흰 셔츠에 검은 뿔테 안경을 쓴, 눈이 큰 청년이었다. 반짝이가 달린 분홍색 고깔모자를 머리에 얹으며 그가 함박웃음을 지었다.

“자, 그럼 생일 축하 노래를 불러볼까요. ‘사랑하는…’ 대신에 ‘이랜드 노동자들의 생일 축하합니다’로 부릅시다.”

청년의 선창에 따라 알록달록한 고깔모자를 쓴 학생 이십여 명이 생일 케이크를 들고 노래를 불렀다. 2010년 5월4일 서울대의 초청을 받고 이랜드 박성수 회장이 강연을 하러 온다는 소식을 듣고 모인 이들이었다. 청년은 미리 준비한 펼침막 한쪽을 들고 앞장서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현수막에는 ‘글로벌 경영의 선두주자 이랜드 박성수 선배님 환영행사 - 이랜드 노동자들의 소박한 꿈을 응원하는 사람들’이라고 쓰여 있었다.

2007년 비정규직 노동자 수백 명을 무더기 해고한 이랜드그룹의 노동 탄압에 항의하는 의미에서 준비한 퍼포먼스였다. 원래 공지된 강연 제목 ‘글로벌 비즈니스와 리더십’을 패러디해서 그들은 이 강연의 주제를 ‘글로벌 구조조정과 불안정노동 리더십’이라 명명했다. 그날 강연은 취소되었고, 재기발랄한 이날의 시위는 ‘성수대첩’이란 제목의 동영상으로 만들어졌다. 그가 피디가 되기 전, 동료들과 함께 기획하고, 제작한 첫 영상물이었다.

그로부터 6년 뒤, 청년은 대학을 졸업하고 방송사에 입사했다. 씨제이이앤엠(CJ E&M)의 엔터테인먼트 채널 티브이엔(tvN)에서 그는 드라마 <혼술남녀>의 막내 피디로 일했다. 그리고 입사 아홉 달 만인 지난해 10월26일, 그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청년의 이름은 이한빛. 만 27살로 생을 마감한 청년의 약력은 단출하다. 1989년 서울 출생. 서울 상경중, 경남 거창고를 거쳐 서울대 정치학과 졸업. 공군 복무. 2016년 티브이엔 입사 그리고 죽음.

애초 그의 죽음에 대해 “평소 근무태도가 불량하고 나약해서” 일어난 일이라고 주장했던 씨제이 쪽은 사건 발생 8개월 만인 이달 초 자사 누리집(홈페이지)에 공식 사과문을 게재하고 “이한빛 피디의 죽음을 무겁고 엄중하게 받아들여 관행적인 제작시스템을 선진화”하겠다고 발표했다. 애초 유족들의 주장대로, 이한빛의 죽음이 단순한 개인사가 아니라는 것을 인정한 셈이었다. 이한빛은 왜 죽었을까? 무엇이 그를 죽음이란 막다른 골목으로 내몰았을까? 지난 11일, 고 이한빛 피디의 유족을 만나러 서울 도봉구 자택으로 찾아갔다.

한빛 태어나던 해 학교에서 쫓겨나
복직될 때까지 5년간 교육운동 나서
어려서부터 사회문제 관심 많던 아들에게
‘소신발언 하는’ 교수 되라 권유했지만

“40대까지 부모에게 의존하기 싫다”
자신의 작품 하겠단 꿈 갖고 피디 선택
CJ E&M 입사 9개월만에 떠나보내고
애간장 녹는 고통으로 중환자실 실려가

‘애간장이 녹는다’는 말 실감해

“날이 덥지요? 저희 집에 에어컨이 없어서….”

영상에서 본 이한빛과 눈빛이 꼭 닮은 아버지 이용관(61)씨가 선풍기를 돌려놔 주며 말했다. 그는 현직 중학교 국어교사이다. 의정부에서 중학교 교감선생님으로 근무하는 부인은 아직 학교에서 돌아오지 않은 모양이었다.

-몸은 좀 어떠세요? 간농양으로 입원하셨다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간에 농양이 8센티 정도 생겨가지고요. 이제는 괜찮습니다.”

-간염하고는 다른 건가요?

“이게 면역체계가 무너져서 생기는 병이라고 하더라고요. 바이러스가 침입해서 간에 고름주머니가 생기는 건데, 그게 간에 나타날 수도 있고 뇌에 나타날 수도 있다고. 겉으로 구멍을 뚫어서 고름을 빼내는 시술을 받고 약을 먹었는데, 다른 데로 전이만 안 되면 괜찮대요.”

-평소 간질환이 있으셨나요?

“전혀요. 술을 많이 먹어도 숙취로 고생하는 일은 거의 없었을 정도로, 간 건강에 대해선 좀 자만할 정도였는데.(잠시 침묵) 무리를 했나 봐요. 한빛이 죽고 나서.”

-‘애간장이 녹는다’는 말, 그대로군요.

“제가 국어선생이라 ‘애간장이 녹는다’ 그런 표현을 가르쳤는데, 그 말을 정말 실감했어요. 상대가 재벌 기업이기 때문에 쉽게 타결될 거라고 생각은 안 했지만…. 처음에 한빛이 죽고 한 6개월간 변호사하고 한빛이·한솔이 친구들하고 가족대책위를 꾸려서 회사 측하고 얘기를 했는데, 우리가 자료를 요청하고 출근부나 기록부도 열람하게 해달라고 해도 안 해주고, 뭘 조사해야 할지 리스트를 써서 보내도 제대로 조사도 안 하고….”

갑작스레 생때같은 아들을 잃은 것도 하늘이 무너지는 충격이었지만, 아들이 죽은 이유를 밝혀내는 과정에서 겪은 수모와 냉대는, 시시각각 애간장을 태우고 피를 말리는 고통이었다. 맨정신으로는 도저히 잠을 이룰 수가 없어 매일 밤 아내 몰래 일어나 술의 힘을 빌려 잠깐씩 눈을 붙이는 생활이 이어졌다. 결국 지난 4월, 공동대책위원회 결성을 며칠 앞두고 쓰러져 중환자실로 실려 가는 바람에, 투쟁 과정에 직접 나서지 못하고 아내에게 짐을 넘긴 게 못내 미안하고 안쓰러웠다고 했다.

“어이쿠, 더운데 여기 앉아 계세요? 한빛이 방에 에어컨 있는데 그리 들어가시죠.”

아내 김혜영(59)씨가 분주하게 집으로 들어서며 우리를 안방으로 안내했다. 지난해 부부는 안방을 한빛이에게 내주고 작은 에어컨도 달아줬다. 고등학교 이후 부모와 떨어져 지낸 아들이 티브이엔에 입사한 뒤, 집에서 출퇴근하겠다고 자청하자 엄마는 잠시 쉴 때만이라도 편히 지내라고 안방을 한빛이 방으로 꾸몄다. 아들이 좋아할 푸른색 파스텔 톤으로 벽을 바르고 한쪽 벽면에 책장과 책상을 넣었다. 책장에는 학사모를 쓴 한빛의 대학 졸업사진과 크고 작은 상패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영화평론상도 탔네요.

“대학신문에서 준 상인데, 대상이 없는 가작상을 타가지고 그 상금을 우리한테 줬어요. 여행 다녀오라고.”

-원래 피디 되는 게 꿈이었나요?

“첨엔 기자가 되고 싶다고 했어요. <제이티비시>(JTBC) 기자시험에도 최종합격했는데, 결국 피디를 택했죠. 기자는 한 10년 이상 근무해야 자율성이 생기는데, 피디는 한 3~4년 되면 자기 작품을 할 수 있으니, 자기가 생각하는 사회적 메시지를 던질 수 있을 거라고 하더라고요.”

자식의 판단을 존중하고 크게 간섭하지 않는 걸 원칙으로 삼아온 게 잘못이었을까. 아들이 죽고 나니, 모든 것이 부모 탓인 것 같다며 그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사진 속의 한빛이는 여전히 해사한 미소를 머금고 있다. 액자 아래로 반듯하게 펼쳐진 봉투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봉투 겉면엔 ‘엄마 아빠께. 믿어주셔서 감사해요. 그리고 사랑해요♥’라고 쓰여 있었다. 한빛의 필체였다. 대학 시절 아들이 타온 원고료를 부모에게 건네며 남긴 봉투를, 부부는 지금도 소중한 가보처럼 보관하고 있다.

아들은 왜 죽었을까?

이용관은 전교조 해직교사였다. 한빛이 태어나던 해, 그는 학교에서 쫓겨났고 94년 다시 복직될 때까지 5년간 전교조 정책위원장, 참교육연구소 소장을 맡아 교육운동의 전면에 나섰다. 자식들에게 자신의 입장을 강제한 적은 없지만 어려서부터 사회문제에 관심이 많고 고교 시절 신문편집국장까지 했던 한빛은 서울대에 입학한 뒤 학생운동과 진보신당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한빛이 학생운동 하는 거, 안 말리셨어요?

“아비 마음이 되게 이율배반적인 것 같아요. 아들이 자랑스럽고 믿음직하면서도, 한편으론 아들이 적당히 개인적인 욕심도 챙기면서 살면 좋겠다는 이중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어요. 그래서 한빛이더러 대학원 가서 교수가 되라고 꼬신 적도 있어요. 대한민국에서 진보적인 사고를 가지고 살아가는 데 최고의 직업은 교수다, 먹고사는 데도 걱정 없고, 하고 싶은 이야기 다 해도 안 잡혀가고. 나 같은 교사는 하고 싶은 얘기하면 잘리고 감방 가지만 교수는 소신껏 발언할 수 있다고요.”

-그러니 뭐라던가요?

“교수 되려면 적어도 40대까지 부모한테 의존하고 살아야 하는데, 자긴 부모한테 얹혀 지내긴 싫다고 하데요. 대학원을 가더라도 자기가 돈 벌어서 나중에 가겠다고 하는데, 반박할 논리도 없고. 그때 강제적으로라도 난리를 쳐서 대학원 가게 할 걸 잘못했나 봐요.”

그는 고개를 숙였고, 곁에 앉은 어머니는 눈물을 글썽였다. 이분들한테 뭘 더 물어볼 수 있을까. 본격적인 질문을 앞두고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제가 ‘열림’ 인터뷰를 시작한 지 여러 해가 되지만, 자식 잃은 부모님 뵐 때마다 힘들어요. 그 마음을 다 헤아리지도 못하면서 자식 죽은 얘길 잔인하게 꼬치꼬치 캐물어야 하니….

“대부분 사람들은 ‘아까운 젊은이가 죽었다’ 그러고 말 텐데, 짧지만 한빛이가 살았던 삶과 그가 죽음으로써 던진 의미를 조금이라도 사람들한테 알릴 수 있다면 제 아픔은 감수해야지요. 부모로서 당연한 업보예요.”

-한빛이 왜 죽었을까요?

“저도 개인적으로 딱 까놓고 말하면, ‘왜 죽었어야 했을까?’ 수없이 질문해요. 끝까지 살아서 투쟁을 하지. 죽긴 왜 죽어? 성당에 가서 하느님한테 무수하게 대들고 싸웠어요. ‘왜 걔를 데려가셨냐?’고. 나보다 책도 많이 읽고 나보다 훨씬 생각도 앞서가던 아이인데….”

-아드님을 마지막으로 보신 게 언젠가요?

“<혼술남녀> 마지막 촬영이 (지난해 10월) 21일날 있었는데 전날 새벽에 들어왔다가 낮에는 종일 누워 있더라고요. 피곤해서 그런가 보다 했어요. 그날 마침 할아버지 제삿날이라 내가 점심 무렵에 잠깐 집에 들렀다가 삼겹살 굽고 밥 차려놓고 나갔는데 퇴근해서 와 보니 밥 먹고 또 누워 있더라고요. 그러곤 저녁 7시경에, 우리가 부엌에서 제사 준비하고 있는데 주섬주섬 가방을 싸더니 나갔어요. 종방 촬영 간다면서. 근데 거길 안 간 거죠.”

그러고는 연락이 끊겼다. 문자를 보내도 답이 없었지만, 한번 촬영 들어가면 2~3일간 연락이 끊기는 적도 있었던 터라 바빠서 그런 줄 알았다. 그로부터 나흘 후인 25일, 회사 인사팀에서 이한빛이 무단결근을 했다고 전화가 오기까지 부모는 아들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 거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다. 부랴부랴 경찰서에 실종신고를 하고 핸드폰 위치추적을 요청했다. 그날 밤 11시께, 서울역 부근에서 신호가 잡힌다기에 바로 달려가겠다고 하니, 경찰이 알아서 찾아볼 거라고 오지 말라고 했다. 자정 넘어 핸드폰 신호마저 끊겼다.

다음날 아침 한빛이 묵었던 호텔을 찾아낸 건 아버지 이용관씨였다. 아침 일찍 서울역 부근에서 눈에 띄는 호텔을 찾아 들어가니, 이한빛이란 이름으로 투숙한 이가 있다고 했다. 뒤늦게 경찰이 도착했을 때, 아들은 이미 목숨을 끊은 뒤였다. 탁자 위에는 유서가 담긴 노트북과 노트북 비밀번호가 적힌 쪽지가 놓여 있었다.

고등학교 이후 부모와 떨어져 지낸 아들이 티브이엔에 입사한 뒤, 집에서 출퇴근하겠다고 자청하자 어머니 김혜영씨는 잠시 쉴 때만이라도 편히 지내라고 안방을 한빛이 방으로 꾸몄다. 아들이 좋아할 푸른색 파스텔 톤으로 벽을 바르고 한쪽 벽면에 책장과 책상을 넣었다. 책장에는 학사모를 쓴 한빛의 대학 졸업사진과 크고 작은 상패가 가지런히 놓여 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고등학교 이후 부모와 떨어져 지낸 아들이 티브이엔에 입사한 뒤, 집에서 출퇴근하겠다고 자청하자 어머니 김혜영씨는 잠시 쉴 때만이라도 편히 지내라고 안방을 한빛이 방으로 꾸몄다. 아들이 좋아할 푸른색 파스텔 톤으로 벽을 바르고 한쪽 벽면에 책장과 책상을 넣었다. 책장에는 학사모를 쓴 한빛의 대학 졸업사진과 크고 작은 상패가 가지런히 놓여 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노동자를 착취하는 관리자로 살긴 싫었어요’

많이 꼬여 있었어요. 이십대의 삶은. 항상 더 위로 올라오긴 했지만 앞선 단계의 고민을 채 마무리하지 못한 도약이었어요…. 촬영장에서 스태프들이 농담 반 진담 반 건네는 ‘노동착취’라는 단어가 가슴을 후벼 팠어요. 물론 나도 노동자에 불과하지만, 적어도 그네들 앞에선 노동자를 쥐어짜는 관리자 이상도 이하도 아니니까요. 하루에 20시간 넘는 노동을 부과하고 두세 시간 재운 뒤 다시 현장으로 노동자를 불러내고 우리가 원하는 결과물을 만들기 위해 이미 지쳐 있는 노동자들을 독촉하고 등 떠밀고, 제가 가장 경멸하는 삶이기에 더 이어가긴 어려웠어요.(이한빛 유서 중에서)

드라마 마지막 촬영날 집 나선 이후
호텔에서 주검으로 발견되기 전까지
집과 서울대 주변 떠돌며 홀로 고민
유서에 ‘노동자 쥐어짜는 자괴감’ 남겨

1년전 아들이 찾았던 구의역에 가
‘김군! 우리 아들 만나 잘 지내길’ 추모
“학교 자체도 사람 서열화시키는 역할
그 안에 있는 교사로서 애들한테 미안해”

유서는 시종일관 담담하고 냉정했다. “지금 전 술을 한 잔도 마시지 않았습니다. 왜냐면 술 탓에 이렇게 했을 거라고 생각하실까봐. 그러나 이 편지를 다 쓰고 나면 맥주를 마실 겁니다”라면서 그는 ‘부모님에 대한 사랑과 자신의 선택은 무관한 것’이라고 거듭 강조했다. 연락을 끊고 잠적한 기간 동안 이한빛은 집 부근인 상계동과 서울대 근처의 녹두거리를 배회했다는 게 나중에 밝혀졌다. 서울대입구역 부근에서 그를 봤다는 이도 있고 녹두거리에서 그를 봤다는 이도 있었다. 그러나 그를 만났다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왜 이한빛은 며칠 동안 집과 학교 주변을 떠돌며 혼자만의 시간을 가졌을까? 그 시간 동안 무슨 생각을 하며 죽음을 결심했을까?

-상식적으로 볼 때 격무에 따른 스트레스 때문에 충동적으로 자살을 택한 사람 같진 않은데요. 보통 드라마 제작 현장이라는 곳이 종방 촬영을 하고 나면 그간 쌓인 설움이나 시련을 무용담처럼 나누고 회포를 푸는 게 관례인 걸로 아는데, 왜 방송을 다 마치는 시점에 죽음을 택했을까요?

“이미 얘가 의욕을 잃고 있었던 것 같아요. 처음 드라마 시작할 땐, 배우 박하선 실물이 화면보다 훨씬 예쁘다는 둥, 망가지는 연기가 어떻다는 둥 우리한테 이런저런 얘기도 하고 그랬어요. 근데 막판에 시청률이 5% 올라갔다고 내가 막 기뻐하며 얘기하니까, 그저 시큰둥하니 별말도 안 하더라고요.”

-유서를 보면 ‘노동자를 쥐어짜는 관리자’ 역할을 하는 자신에 대한 자괴감이 컸나 봐요.

“한빛이 엄마랑 아침 먹을 때 그런 얘길 했대요. 촬영한 게 마음에 안 든다고 (피디가) 계약직 촬영스태프를 싹 교체했대요. 그래서 5천만원 선금 준 거에서 50%를 반환하라고 하는데, 그걸 독촉하는 일이 자기한테 떨어졌다고. 그 사람들 1년 내내 일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그 정도가 많이 받는 것도 아닌데, 어떤 사람은 선급금을 이미 전세금으로 썼고, 어떤 사람은 빚 갚는 데 써버려서 토해낼 길도 없다고요. 정말 안쓰럽다고 하더래요.”

-학생 때는 비정규직 노동자를 위한 연대투쟁에 앞장섰던 젊은이인데, 자신이 그들을 궁지로 내모는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게 많이 괴로웠겠군요.

“근데 또 하나의 갈등은 이런 것 같아요. 정작 비정규직이나 계약직, 알바 같은 노동자들은 이런 구조를 어떻게 개선해야 하나 노력하는 게 아니라, 그냥 무기력하게 살아남기 위해서 대충 순응하고. 어차피 자기들은 계약직이고 돈도 얼마 받지 않으니까, 이 회사에서 출세하려면 정규직인 니가 알아서 해봐라, 그런 식의 태도. 이런 게 더 절망감을 준 거예요. 이 사회가 과연 변할 수 있을까, 몇 명이 발버둥 친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란 생각을 했겠죠. 한빛이 폰에 있는 카톡 대화 내용을 보면, 그런 갈등 때문에 어찌해볼 수 없는 절망감을 느꼈을 거란 생각이 들어요.”

상업화된 미디어의 무한경쟁 시장에서 피디란 직업은 한빛이 기대했던 것처럼 ‘사회적 메시지를 던질 수 있는 자율성’을 가진 존재가 아니었고, 그가 만난 방송 현장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그가 만났던 이랜드 노동자들처럼 인간적 존엄을 위해 싸울 준비가 되어 있지도 않았다. 왜 이한빛은 좀 더 손쉬운 길을 택하지 않았을까? 더 높은 자리에 올라가고 더 많은 권력을 가지게 되면, 그때 가서 좀 더 좋은 노동조건을 제공해줄 수도 있을 거라는 달콤한 자기위안…. 좋은 학벌, 좋은 직업을 성취한 이들 대부분이 그렇듯, 도태되지 않기 위해서 누군가를 밟고 올라가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익숙해지는 것을 이한빛은 어떻게든 거부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 너의 죽음은/ 벌레가 되어 벌레를 밟고 올라가야 하는/ 수직의 벌레기둥을 박차고/ 파란 하늘로 날아간 나비의 죽음이었더구나./ 몇 계단만 참고 오르면 많은 걸 누릴 수 있다는 걸 너는 알았지만/ 사람을 벌레로 밟고 오를 수는 없어서/ 벌레로 밟히면서 벌레를 밟으면서 누릴 수는 없어서 훨훨 하늘을 향해서 몸을 던진 것이었더구나.(이한빛의 중학교 은사 나승인의 추모시 중에서)

내가 이한빛이다

피라미드의 정상을 향해 질주하는 이들에게 그는 ‘나약한 사회부적응자’로 비쳤을지 모르지만, 세상엔 다행히도 그의 아픔과 절망에 깊이 공감하는 ‘또 다른 이한빛들’이 더 많았다. 4월18일 청년유니온을 비롯한 35개 시민사회단체가 연대해서 ‘tvN 혼술남녀 신입조연출 사망사건 대책위원회’를 구성했다. 이한빛의 명예 회복, 공식 사과, 그리고 재발 방지를 위한 노동자들의 처우 개선 세 가지가 요구사항이었다. 서울 상암동 씨제이 사옥 앞에서 ‘이한빛 피디 추모문화제’와 1인시위가 연달아 벌어지고, “카메라 뒤에 사람이 있다” “내가 한빛이다”와 같은 구호가 방송노동자들과 청년들 사이에 뜨거운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두 달 뒤 씨제이 쪽은 유족과 대책위 관계자를 만나, 이한빛 피디의 명예 회복과 방송 제작 환경 개선을 약속하는 공식문서에 서명했다.

-이한빛 대책위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과 열의가 아주 대단했어요.

“세상에 따뜻한 사람이 정말 많다는 걸 느꼈어요. 대책위 후원금 계좌로 모인 돈만 천만원이 넘었대요. 행사비로 쓰기에 충분한 돈이었어요. 방송노동 실태 파악을 위한 제보센터를 만들었는데 불과 2~3주 사이에 150여건의 제보가 쏟아졌고요. 1인시위를 하는데 대기자가 많아서 어떤 날은 두 팀씩 같이 하기도 했어요.”

-세월호 유족들한테 ‘자식 팔아 돈 챙긴다’는 악담이 쏟아진 적도 있었습니다. 그런 봉변을 당하진 않으셨어요?

“돈 얘긴 꺼내지도 않았어요. 회사가 위로금 명목으로 얼마를 주겠다고 해서, 그걸 받으면 내가 그 돈 전액을 내놓을 테니 회사에서도 같은 액수를 출연해라. 그걸로 방송노동자를 위한 기금을 만들자고 제안했지요. 회사에서도 그렇게 하겠다고 했고요. 앞으로 이 기금으로 비정규직 방송노동자들을 위한 권리센터나 쉼터 같은 걸 만들고 싶어요. 지금 방송노동자들을 보호하는 법이 없는데, 9월쯤엔 국회에서 이와 관련한 토론회도 하려고 해요.”

-카톡 대화를 다 보셨다면서, 평소 이한빛 피디한테 폭언을 하거나 부당한 지시를 내린 직속 상사나 선배에 대해서는 유감 없으세요? 부모 마음에 억울하고 분해서라도 뭔가 조치를 취하고 싶었을 텐데요.

“한빛이는 자기를 괴롭힌 누구에 대한 개인적인 원망이 아니라, 구조적인 문제들, 근본적인 적폐에 대해서 온몸으로 고민하다가 죽었어요. 선임피디나 국장이 괴롭힌 거, 그 위의 상관들이 방기한 거에 대해서 도의적 책임을 물을 순 있겠지만, 그 사람들한테 초점을 맞추게 되면 회사는 꼬리 자르기를 하고 빠져나가죠. 내가 분노심에서 개인의 문제로 물고 넘어지면 일시적인 분풀이는 될 수 있을지언정 한빛이의 죽음의 의미를 살리는 데는 도움이 안 될 거라고 봤어요. 물론 엄마는 여전히 그 분노가 안 삭여져서 힘들어하지만요.”

고 이한빛 피디의 아버지 이용관씨와 어머니 김혜영씨가 11일 저녁 서울 도봉구 도봉동 자택에서 이진순씨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고 이한빛 피디의 아버지 이용관씨와 어머니 김혜영씨가 11일 저녁 서울 도봉구 도봉동 자택에서 이진순씨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김군과 한빛이 같이 웃는 세상을 위해

한빛 아버지는 지난 5월, 구의역 참사로 희생당한 김군 1주기를 앞두고 현장을 찾아갔다. 1년 전 구의역 사고 직후 아들이 김군을 추모하기 위해 일부러 그곳을 찾았던 것처럼. 그는 구의역을 떠나기 전, 작은 포스트잇에 추모글을 남겼다. “김군! 하늘나라에서 우리 아들 한빛이랑 만나서 행복하게 잘 지내길 바라…. 젊은이가 희망과 꿈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회를 우리가 만들어줄게.”

-하늘나라에선 둘이 함께할 수 있을까요? 안타깝게도, 우리 현실에선 고등학교를 졸업한 비정규직 노동자와 서울대를 나온 정규직 피디의 삶의 무게를 동등하게 대우해 주지 않습니다.

“요즘 청년들은 4단계의 층층으로 갈려 있어요. 일자리가 없어 힘든 청년, 알바일 하는 청년, 비정규직으로 일하는 청년, 정규직에 들어가서도 경쟁구조 때문에 남을 밟고 일어서지 않으면 안 되는 청년. 이런 구조 속에서 그 누구도 행복해질 수 없죠.”

-세칭 일류대를 다니는 이들 중에는 학교별로 사람을 등급화하고, 심지어 정시, 수시, 농어촌특례 같은 걸로 나눠서 자기보다 아래 등급의 사람들을 무시하는 걸로 위안을 삼는 경우가 있어요. 그런 면에서 이한빛 피디는 남들이 선망할 만한 조건을 두루 갖추고 있는데 정작 본인은 갑의 위치에 서는 걸 그다지 기쁘거나 자랑스럽게 여기지 않았나 봅니다.

“그렇죠. 걔는 끊임없이 그것에 대해 갈등했죠. 처음에 입사할 땐 씨제이 전체 500명 신입사원 중에서 아이디어가 우수한 열 명을 뽑는 데 자기가 들었다고 무척 자랑스러워하기도 했어요. 적응하려고 나름 노력도 했고요. 조금만 참으면 갑이 될 수 있다지만, 그걸 참는 것 자체가 힘들어서 끊임없이 고민하고 갈등했던 것 같아요. 최고의 조건을 갖췄지만, 한빛이는 밟고 올라서는 세상은 의미가 없다고 생각해서 죽었죠.”

-쪽지에 쓰신 대로 ‘김군과 한빛군이 만나서’ 거대한 불의를 바로잡기 위해 손을 마주 잡는 게 가능할까요? 똑똑한 애들한테는 ‘넌 착취체계를 관리하는 관리자가 되어라’ 가르치고, 뒤처지는 애들한테는 ‘넌 이들에게 순종하는 노동자가 되어라’라고 가르치는 세상인데요.

“학교 자체도 사람을 서열화시키고 계층화시키는 역할 이상을 못하고 있는 거죠. 나도 (교사로서) 그 구조 안에 있는 사람이고요. 그래서 맨날 애들한테 미안해요. 그걸 바꾼다는 게 가능할까…. (잠시 침묵) 영역별로 깨어나지 않으면 진척이 없겠죠. 쉽진 않겠지만 조금씩 될 거라고 믿어요.”

2008년 신입생 시절 이한빛이 홈플러스 연대집회에 다녀온 뒤 쓴 글이 있다. 그는 죽을 때까지 그때의 마음가짐을 허물지 않았다.

비정규직 노동자에게, 노점상에게, 노숙자에게 연대의 손길을 내미는 것은, 그들의 투쟁과 노력에 어깨를 걸고 함께하는 것은 단순히 그들의 삶을 함께 지켜주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러한 연대를 통해, 그러한 단결을 통해 우리의 삶을 지켜내기 위해서이다.(2008 <광우병, 그리고 비정규직>, 이한빛 추모집 중에서)

녹취 심지연

▶ 이진순 풀뿌리정치실험실 ‘와글’ 대표. 언론학 박사. 새로운 소통기술과 시민참여가 세상을 어떻게 바꾸는지 연구하는 것을 주업으로 삼는다. 사람 사이의 수평적 그물망이 어떻게 거대한 수직의 권력을 제어하는지, 평범한 사람들의 따뜻함이 어떻게 얼어붙은 세상을 되살리는지 찾아내는 일에 큰 기쁨을 느낀다. ‘열린 사람들과의 어울림’(열림)을 격주로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