촛불 민심은 ‘큰 꿈’을 꾸는 반기문 총장 지지세를 잠식하는 모양새다. 반 총장한테 광화문 촛불집회와 국회의 대통령 탄핵 소추에 따른 조기 대선 국면은 예상하지 못한 악재다. 지지율 하락세, ‘늙은 보수’ 이미지, 조직된 정치세력의 부재, 시간 부족 등 ‘4중고’다. 조기 대선은 반 총장한테 ‘검증 시간 단축’이라는 선물과 함께 ‘시간 부족’이라는 난제를 동시에 안겼다. 2015년 5월19일 인천시 연수구 송도컨벤시아에서 열린 2015 세계교육포럼에 참석한 반 총장의 다양한 표정들. 인천/김봉규 기자 bong9@hani.co.kr
촛불 민심은 ‘큰 꿈’을 꾸는 반기문 총장 지지세를 잠식하는 모양새다. 반 총장한테 광화문 촛불집회와 국회의 대통령 탄핵 소추에 따른 조기 대선 국면은 예상하지 못한 악재다. 지지율 하락세, ‘늙은 보수’ 이미지, 조직된 정치세력의 부재, 시간 부족 등 ‘4중고’다. 조기 대선은 반 총장한테 ‘검증 시간 단축’이라는 선물과 함께 ‘시간 부족’이라는 난제를 동시에 안겼다. 2015년 5월19일 인천시 연수구 송도컨벤시아에서 열린 2015 세계교육포럼에 참석한 반 총장의 다양한 표정들. 인천/김봉규 기자 bong9@hani.co.kr
[토요판] 커버스토리 반기문 탐구 
김선일씨 피살 직후 ‘경질론’ 넘기고
‘홍석현 카드’ 낙마로 찾아온 행운 
노 대통령 헌신 덕에 사무총장 됐으나
노 사망 2년6개월 지나 비공개 참배
“인간적으로 실망했다” 비난 한몸에

새벽에 출장에서 돌아와 사무실 직행
“일 욕심만큼은 끝내주는 사람” 평가
반기문기념관에 걸린 ‘반기문 명언’
70년대 근대화 시절에나 어울릴 법
한국 사회 시대 흐름과는 맞지 않아
‘한국인 유엔 사무총장’을 단군 이래 최고의 작품이라는 이들이 있다. 앞으로 100년을 기다려도 다시 하기 어려운 자리라는 얘기도 있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 10년’은 그래서 무겁다. 반기문 총장은 20일(현지시각) 뉴욕 유엔본부에서 진행된 한국 특파원단 간담회에서 “대한민국 발전에 도움이 된다면 제 한 몸을 불살라서라도 그걸로 갈 용의가 있다”며 사실상 ‘대선 출사표’를 던졌다. 언론이 대서특필했고 정치권과 여론이 요동친다. 반 총장은 “퇴임 뒤 ‘생산적 글로벌 시민’(productive global citizen)이 되는 가장 좋은 방법”(5월31일 스테판 뒤자리크 유엔 대변인)으로, 세계인의 존경과 사랑을 받을 ‘글로벌 원로’보다 ‘대한민국 대통령’의 길을 걷고 싶다는 것이다. 모험이다. 반 총장의 사회적 고향인 한국 외교부의 젊은 외교관들은 최근 ‘영원한 유엔 사무총장으로 남아주십시오’라는 연서명 서한을 반 총장한테 보내는 ‘집단행동’을 추진하다 접었다고 한다. 1월15일께 귀국해 전국을 돌며 ‘귀국보고회’ 형식의 ‘강연 정치’에 나설 계획인 ‘반기문’을 12개의 열쇳말에 기대어 풀어봤다.

김선일

2004년 6월22일 밤 10시20분, 미군과 이슬람 반군의 공방이 한창이던 이라크 바그다드에서 팔루자 방향으로 35㎞ 지점에서 한국인 주검이 미군에 발견됐다. 목이 잘리고 참혹하게 훼손된 채로. 현지에 진출한 가나무역 소속 통역사로 일하며 비공식적으론 개신교 포교 활동을 하던 선교사 김선일씨였다. 가해자는 ‘유일신과 성전’이라는 이슬람 무장단체(이슬람국가(IS)의 전신). ‘이라크 파병 방침을 철회하라’는 요구를 한국 정부가 거부하자 김씨를 참수한 것이다. 한국 사회는 패닉에 빠졌다.

이라크 파병 반대 여론에 시달리던 참여정부엔 ‘초대형 악재’였다. 여야 불문하고 외교부 장관 경질을 촉구했다. 민심을 달랠 ‘희생양’이 필요했다. 헌법재판소가 당시 한나라당 등의 대통령 탄핵 소추를 기각(2004년 5월14일)해 복귀한 노무현 대통령이 분위기 쇄신 차원에서 부분 개각을 고려하던 터다. 언론은 외교부 장관 경질을 기정사실로 여겼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이 그때 외교통상부 장관이었다. 그해 1월17일 임명됐으니 다섯달 남짓 지났을 때다. ‘기름장어’라는 별칭으로 유명한 반 총장은 한때 ‘반 차관’이라 불렸다. 김영삼 정부 때인 1996년 2월 대통령 의전수석비서관에 오른 이래 2004년 1월 장관이 되기까지 8년 가까이 ‘차관급’만 전전해서다. “대한민국 정부 역사에서 내가 차관 노릇을 가장 오래했을 거예요. 그래서 주변 사람들이 나를 ‘반 차관’이라고 부르기도 해요.” 장관 시절 반 총장이 기자한테 해준 얘기다. 나서지 않고 실무를 꼼꼼하게 챙기는 ‘2인자 기질’을 느낄 수 있는 이력이다.

그는 ‘5개월 단명 장관’의 독배를 피하고 싶었다. 그때 베테랑 기자가 이런 조언을 했다. “당장 청와대에 사표를 내라. 노 대통령은 책임이 없는 장관을 희생양으로 삼을 사람이 아니다. 대통령이 사표를 반려하면 경질론은 사라진다.” 반기문은 사표를 냈고, 그 기자의 ‘예언’대로 노 대통령은 “누가 그 자리에 있었어도 어쩔 수 없는 일”(최광웅, <노무현이 선택한 사람들>, 24쪽)이라며 반려했다. 노 대통령은 오히려 집권당인 열린우리당에 “여론몰이식 대응 자제”를 주문했고, 그해 6월30일 통일·보건복지·문화관광 등 3개 부처 장관만 바꿨다. ‘경질 1순위’로 거론되던 ‘반기문 외교통상부 장관’은 살아남았다.

그때 노 대통령이 외교장관을 경질했다면 ‘한국인 최초 유엔 사무총장 반기문’도 없다.

노무현 ①

2004년은 ‘인간 반기문’한테 ‘결정적인 해’다. “2004년의 일이다. 반기문 장관이 한국도 차기 유엔 사무총장 후보를 낼 필요가 있다며 3인의 후보 명단을 적어 왔다. 2006년 말로 끝나는 코피 아난 사무총장 후임에 아시아계 사무총장의 당선이 유력하며, 우리나라도 해볼 만하다는 것이었다. 그가 제시한 1·2순위는 외교장관 출신, 3순위는 반기문 장관 본인이었다.”(이종석, <칼날 위의 평화>, 378쪽). ‘인간 반기문’의 숨겨진 야심이 엿보이는 증언이다. 처음엔 ‘재주는 곰이 넘고 돈은 되놈이 버는’ 형국으로 흘렀다. 노 대통령이 ‘조중동’ 보수언론 3각 편대에 균열을 내고자 중앙일보사의 사주인 홍석현을 주미대사에 임명했고, “(한국인) 유엔 사무총장 후보로는 홍(석현) 대사로 정해지는 분위기였다”.(이종석, 379쪽) “홍석현 <중앙일보> 회장이 2004년 말 주미대사로 내정되면서 일찌감치 출마 의지를 피력”(최광웅, 24쪽)한 터다. 그런데 홍 대사가 ‘삼성 엑스(X)파일 사건’으로 대사가 된 지 7개월 만인 2005년 9월 직에서 물러나는 돌발 상황이 발생했다.

‘홍석현 카드’의 폐기가 불가피해진 2005년 8월, 대통령의 통일외교안보 분야 핵심 참모인 이종석 당시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사무차장이 노 대통령한테 ‘반기문 사무총장 후보 카드’를 내밀었다. 노 대통령이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왜 반 장관입니까?” 이 차장이 답했다. “균형외교를 실현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이종석, 382쪽) 6자회담에서 9·19공동성명 채택 협상이 한창이던 때다. 참여정부는 내부 절차를 거쳐 2006년 2월14일 반 장관의 유엔 사무총장 출마를 공식 발표했다.

노 대통령은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 만들기’에 헌신적이었다. 정무적 부담을 무릅쓰고 유엔 사무총장 선거 때까지 반 장관의 임기를 보장했다. 정상외교와 순방 일정을 ‘반기문 선거운동’에 적합하게 조정해 각국을 돌아다니며 직접 선거운동을 했다. 이집트·알제리·아랍에미리트·코스타리카·아제르바이잔 등 한국 대통령이 한번도 가지 않은 나라까지 찾아다녔다.

반기문은 2006년 10월14일 제8대 유엔 사무총장에 당선됐고, 그해 11월10일 장관직에서 물러났다. “노무현 대통령의 헌신적인 도움이 아니었다면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은 불가능했을 것”(전직 외교부 장관)이라는 평가는 과하지 않다.

반 총장이 2015년 5월19일 인천시 연수구 송도컨벤시아에서 열린 2015 세계교육포럼 개막식 뒤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는 모습. 김봉규 기자 bong9@hani.co.kr
반 총장이 2015년 5월19일 인천시 연수구 송도컨벤시아에서 열린 2015 세계교육포럼 개막식 뒤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는 모습. 김봉규 기자 bong9@hani.co.kr

노무현 ②

2009년 5월23일 노무현 전 대통령이 고향인 김해 봉하마을 부엉이바위에서 뛰어내려 영원히 숨을 멈췄다. “너무 슬퍼하지 마라. 누구도 원망하지 마라. 운명이다”라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충격·분노·슬픔이 한국 사회를 덮쳤다. 이명박 정부의 한승수 국무총리와 참여정부의 한명숙 전 총리가 공동위원장을 맡은 ‘고 노무현 전 대통령 국민장 장의위원회’가 꾸려졌다. 그러나 반 총장은 고 노 대통령 영결식(2009년 5월29일 경복궁 앞뜰)에 참석하지 않았다. 유족 등의 간곡한 요청에도 영상·서면 메시지를 보내지 않았다. 장의위원회 고문에 이름을 올린 게 전부다.

반 총장은 그 뒤 여러 차례 방한했지만 노 전 대통령의 묘소가 있는 봉하마을 근처엔 얼씬도 하지 않았다. 2011년 8월 김진표 당시 민주당 원내대표가 반 총장을 향해 “(노 전 대통령) 장례식 두달 뒤 제주를 다녀가면서도 김해(봉하마을)에는 들르지 않더라. 인간적으로 실망했다”고 ‘직격탄’을 날렸다. 반 총장은 그해 12월1일 봉하마을 노 전 대통령 묘소에 처음으로 참배했다. 그런데 반 총장은 자신의 묘소 참배를 대외비, 곧 언론에 공개하지 말아달라고 요청했다. “개인 휴가 때 이뤄진 비공식 일정”(김경수 더불어민주당 의원, 12일 <시비에스>(CBS) 인터뷰)이라는 게 이유였다. 참여정부 때 대통령 정무수석을 지낸 유인태 전 민주당 의원은 “아무리 정권이 바뀌었다고 그게 대외비로 할 일인가”(<한겨레21> 1131호 인터뷰)라고 힐난했다. 참여정부 사람들한테 ‘인간 반기문’은 ‘배신의 아이콘’이다.

일벌레

반 총장은 “지독한 일벌레”다. 그와 함께 일한 이들의 일치된 평가다. 참여정부 때 청와대 인사수석실 인사제도비서관을 지낸 최광웅씨는 <노무현이 선택한 사람들>에서 반 총장을 “신사 스타일에 보수적이면서도 일 욕심 하나만큼은 끝내주는 사람”이라고 묘사했다.

‘일’과 관련해선 일화가 많다. 반 총장은 2004~2006년 외교장관 시절 외국 출장을 다녀올 때면 어김없이 새벽에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그러곤 세종로 정부서울청사 별관(외교부 청사)으로 직행해 회의를 소집하는 등 밤늦도록 일했다. 젊은 외교부 직원들조차 혀를 내둘렀다. 당시 기자는 그에게 ‘어떻게 잠도 자지 않고 그렇게 일할 수 있냐’고 물은 적이 있다. 그의 대답은 이랬다. “이 기자도 대장이 돼보면 알 수 있어요. 엔도르핀이 솟구쳐 생각보다 힘들지 않아요. 그래도 피곤하면 ‘두시간 동안 아무도 들이지 말라’고 하고 장관실에서 잠시 눈을 붙이면 괜찮아요. 대장은 자기 일정을 조정할 수 있잖아요.”

귤이 회수를 건너면 탱자가 된다지만, ‘일벌레 반기문’은 뉴욕에 가서도 달라지지 않았다. 그는 새벽 4시30분이면 일어나 움직였다. 공식 출장 때도 새벽부터 밤늦도록 쉬지 않고 움직였다. 공식 일정 하루 전에 출장지에 도착해 컨디션을 조절하고, 유엔본부로 돌아와서도 그날은 공식 일정을 잡지 않던 전임 코피 아난 사무총장과 대조적인 스타일이다. ‘가나의 귀족 출신과 한국 빈농 출신의 차이’라는 우스개가 나올 정도다. 반 총장은 6월 홍콩 <봉황 위성텔레비전>에 나와 “(퇴근 뒤) 집에서 일하는 것까지 합치면 일반적으로 자정까지 업무가 이어진다”고 말했다.

‘일벌레 반기문’은 시대의 산물이다. 반 총장의 생가마을에 들어선 반기문기념관(충북 음성군 원남면 상당리 600-1)엔 ‘반기문 사무총장 명언 19가지’가 적혀 있다. “일등이 되어라, 이등은 패배다” “지금 자면 꿈을 꾸지만 지금 공부하면 꿈을 이룬다”. 1970년대 박정희 정권의 ‘조국 근대화’ 돌진 때 젊은 시절을 보낸 한국의 노인들이 자식·손주한테 흔히 하는 ‘조언’과 닮았다. ‘앞만 보고 뛰어라’는 이런 심성·태도는, ‘저녁이 있는 삶’이라는 한 대선 예비후보의 슬로건이 강렬한 사회적 반향과 광범한 지지를 불러온 사회 흐름과 상충한다. 지금 한국 사회에 절실한 건 야간노동과 밤잠을 줄이는 학습인가, 법이 정한 노동·학습 시간의 준수와 적절한 휴식인가?

고 노무현 대통령은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 만들기’에 헌신적이었다. 하지만 반 총장은 2009년 5월 노 대통령이 사망한 뒤 유족 등의 간곡한 요청에도 영상·서면 메시지를 보내지 않았다. 참여정부 사람들한테 ‘인간 반기문’은 ‘배신의 아이콘’이다. 사진은 반 총장의 유엔 사무총장 당선 직후인 2006년 10월24일 노무현 대통령이 그를 청와대로 초청해 차기 사무총장 임명 축하 만찬을 열면서 귀엣말을 나누는 모습. 청와대사진기자단
고 노무현 대통령은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 만들기’에 헌신적이었다. 하지만 반 총장은 2009년 5월 노 대통령이 사망한 뒤 유족 등의 간곡한 요청에도 영상·서면 메시지를 보내지 않았다. 참여정부 사람들한테 ‘인간 반기문’은 ‘배신의 아이콘’이다. 사진은 반 총장의 유엔 사무총장 당선 직후인 2006년 10월24일 노무현 대통령이 그를 청와대로 초청해 차기 사무총장 임명 축하 만찬을 열면서 귀엣말을 나누는 모습. 청와대사진기자단

투명인간

유엔 사무총장은 흔히 ‘세계의 대통령’에 비유된다. 실상은 다르다. 국가원수의 예우를 받되, 주요국 국가원수만큼 권력이 강하지 않다. 유엔헌장은 사무총장을 “수석행정직원”(97조)이라 규정한다. 사무총장을 뜻하는 ‘Secretary Genaral’은 ‘비서’(Secretary)와 ‘장군’(Genaral)의 결합어다. 리더이자 비서, 이게 유엔 사무총장의 몫이다. 사무총장이 ‘세계의 조력자’(Global Facilitator)라고도 불리는 이유다.

31일로 임기를 마치는 반 총장이 ‘세계의 조력자’로서 거둔 가장 큰 성과가 파리기후변화협약이다. 이 협약은 2015년 12월12일 195개국이 서명했는데, 발효까지는 2~3년이 걸리리라 예상됐다. 그런데 발효 최소 요건인 ‘55개국 이상의 비준’과 ‘세계 배출량의 55% 이상 비준’을 충족해 11월4일 정식 발효됐다. 온실가스 1·2위 배출국인 미국 버락 오바마 대통령과 중국 시진핑 국가주석의 전략적 결단, 반 총장의 리더십이 기반이 됐다는 게 일반적인 평가다. 미국의 외교 전문지 <포린 폴리시>는 ‘파리기후변화협정을 구속력이 있는 국제조약으로 성사시킨 공로’를 인정해 반 총장을 ‘2016년 세계 사상가 100인’에 포함시켰다.

하지만 ‘반기문 10년’에 대한 유엔 안팎의 평가는 박하다. 반 총장 측근들 사이에서도 “레거시(길이 기억될 업적)가 없다”는 자탄이 나온다. 이미 많이 알려진 “어디에도 없는 사람”(<포린 폴리시>·2009년) “유엔의 투명인간”(<월스트리트 저널>·2009년, <프랑스24>·2016년) “무력한 관찰자”(<뉴욕 타임스>·2013년) “미국의 푸들”(<폴리티코>·2014년) “가장 둔하고 사상 최악의 사무총장”(<이코노미스트>·2016년)이라는 민망한 험담이 줄을 이었다. 세계적인 유엔 전문가로 꼽히는 토머스 와이스 뉴욕시립대 정치학과 대학원 주임교수는 “10년 동안 반 총장의 레거시(업적)가 뭔지 얘기할 게 없다”고 평했다.(<한겨레> 6월20일치 6면)

큰 꿈

반 총장은 지금껏 ‘대선 출마’를 공식화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각종 여론조사에서 1~2위를 오르내리는 강력한 후보다. 반 총장의 5월 방한 뒤 모든 여론조사기관이 ‘차기 지도자 선호도’ 조사에 ‘반기문’을 넣는다. 반 총장이 5월25일 제주 관훈클럽 간담회에서 “(대통령 선거 출마 관련) 기대가 있다는 것은 염두에 두겠다. 내년 1월1일 돌아오면 한국 시민이 된다. 한국 시민으로서 어떤 일을 해야 하느냐는 그때 고민해서 결심하겠다”고 운을 떼고는 김종필 전 총리 자택(5월28일), 티케이(TK·대구경북)의 정신적 뿌리인 안동 하회마을(5월29일) 방문이라는 정치색 짙은 행보를 한 게 ‘반기문 대망론’에 불을 질렀다. ‘티케이+충청 연대론’의 발동이다.

‘반기문 대망론’은 변변한 대선 후보가 없는 여권에서 불기 시작한 바람이다. 애초 반 총장은 대선 얘기가 나오면 “내가 유엔 사무총장인데 뭐가 아쉽나”라며 손사래를 쳤다고 한다. 여러 언론사가 ‘반기문’을 넣어 대선 후보 선호도 조사를 하자 지인을 통해 “내 이름은 빼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그런데 2014년 봄께부터 태도가 확 달라졌다는 게 지인들의 전언이다. 반 총장의 오랜 지인이 대선 출마 여부를 집요하게 탐문하자, 반 총장의 부인 유순택씨가 “저이를 누가 말려요”라며 그만하라는 눈짓을 했다는 게 그즈음이다. 지금은 ‘반기문 대망론’의 첨병인 김원수 유엔 사무차장, 장욱진 사무총장 비서도 처음엔 ‘출마 반대’였다. 가족과 최측근의 반대에도 ‘출마하지 않겠다’는 말이 없는 건, 그만큼 반 총장의 출마 의지가 강하다는 방증이다.

박근혜

반 총장은 박근혜 대통령과 ‘찰떡궁합’을 과시해왔다. 둘이 함께 참여한 국제회의에선 예외없이 만났다. 지난해 9월 박 대통령이 유엔총회·유엔개발정상회의 참석차 뉴욕에 갔을 땐 나흘간 7차례나 만났다. ‘박·반 연대’, 곧 박 대통령이 여권의 대선후보로 반 총장을 밀려 하는 게 아니냐는 분석이 쏟아졌다.

반 총장도 적극 화답했다. 반 총장은 “아프리카와 아시아 지역에서 산불처럼 새마을운동이 번지고 있다. 뉴욕 맨해튼 중심에서 새마을운동이 진행되고 있다”고 말했다.(2015년 9월26일 새마을운동 고위급 특별행사) 반 총장의 연설이 끝나자 박 대통령이 활짝 웃으며 박수를 치고는 “감사하다”고 했다. 올해 1월1일엔 박 대통령한테 전화를 걸어와 “(한국-일본) 양국이 위안부 문제에 합의에 이른 것을 축하한다. 박 대통령께서 비전을 갖고 올바른 용단을 내린 데 대해 역사가 높게 평가할 것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유엔 사무총장이 할 말이 아니다. 유엔 여성차별철폐위원회(CEDAW)는 3월7일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문제 관련 한-일 정부의 12·28 합의가 “위안부 이슈를 최종적이고 불가역적으로 해결했다는 접근은 피해자 중심적인 접근을 충분히 취하지 않은 것으로 피해자들에게 다시 한번 심적 고통을 주고 있다”며 “위안부 문제는 아직 해결되지 않은 문제”라는 ‘최종 견해’를 밝혔다.

‘세월호 7시간’은 박 대통령의 아킬레스건이다. 반 총장은 2014년 4월29일 뉴욕총영사관에 마련된 세월호 희생자 분향소에 조문 왔다. 그뿐이다. 반 총장은 그 뒤 한국에 왔을 때 세월호와 관련한 추모·기억의 상징적 공간인 팽목항·안산·광화문 어느 곳도 찾아간 적이 없다.

그러나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에 따른 국회의 대통령 탄핵소추안 가결 뒤 ‘박·반 연대’는 풍비박산이 났다. 반 총장이 뒤늦게 “신뢰가 배신당했다”며 박 대통령을 정면 비판한 것이다.(16일 미국 외교협회(CFR) 초청 간담회) 반 총장과 박 대통령의 서로를 향한 ‘열렬한 구애’를 생각하면 상전벽해라 할 만한 표변이다. 영국 시사 주간 <이코노미스트>는 2009년 반 총장을 두고 “강자에 대한 진정성이 10점 만점에 3점 수준”이라고 평가한 바 있다.

재임 중 파리기후변화협정 이끌었으나
북핵 해결 등 한반도 평화 기여 못해
“미국의 모든 것에 동조적인 사람”
“투명인간” “최악의 사무총장” 혹평
‘예스맨 외교관’ 캐릭터는 정치적 약점

여권에서 처음 불지핀 반기문 대망론
‘박-반 연대설’ 타고 기대주 올랐으나
탄핵 국면 맞아 지지세 주춤 현상 뚜렷
‘TK, 새누리, 늙은 보수’ 이미지 강해
정치적 확장성엔 의문부호 따라다녀

늙은 보수

반 총장의 유일한 정치적 자산은 ‘초당파적이고 미래 지향적인 글로벌 리더십의 체현자’ 이미지가 강한 ‘유엔 사무총장’이다. 반 총장도 “통합”을 한국 사회의 최대 화두로 제시했고(5월25일 관훈클럽 간담회), “포용적 리더십”(16일 유엔 출입기자단 회견)을 강조했다. 그런데 반 총장의 5월 방한 행보는 결과적으로 양날의 칼이 됐다. 지지율 1위 후보로 띄운 반면, ‘늙은 보수’ 이미지를 고착화했다.

한국갤럽이 매달 진행해온 ‘차기 지도자 선호도’ 조사에 6월부터 ‘반기문’을 넣었는데, 단박에 1위(26%)를 차지했다. 5월 조사에서 20%로 1위였던 안철수 국민의당 전 대표의 지지율은 반토막(10%)이 났다. 반 총장은 7~10월 넉달간 27~28%의 지지율로 줄곧 1위를 내달렸다.

그러나 반 총장의 지지율은 광화문광장의 촛불집회가 본격화한 11월 21%로 주저앉았고, 12월 조사(6~8일)에선 20%로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전 대표와 동률 1위였다. 촛불 민심이 반 총장의 지지세를 잠식하는 모양새다.

갤럽은 11월부터 문재인-반기문-안철수 3자 구도 조사를 병행하는데, 반 총장은 두달 모두 문 전 대표한테 밀렸다. 11월엔 32% 대 33%, 12월엔 31% 대 36%로 격차가 커지고 있다. 갤럽이 공개한 이 조사의 상세 자료를 보면 반 총장의 지지세력을 가늠할 수 있다. 12월 조사에서 반 총장은 새누리당 지지자의 83%를 흡수했다. 반면 민주당 지지자의 11%, 국민의당 지지자의 19%만 반 총장을 지지했다. 반 총장은 스스로를 보수라 여기는 이들의 50%를 흡수했는데, 중도라 여기는 이들 사이에서는 32%를 얻어 문 전 대표의 38%보다 적었다. 60살 이상의 59%, 50대의 36%를 얻었다. 반면 19~29살(18%), 30대(12%), 40대(22%)에선 지지세가 약했다. 대구·경북에서만 1위(40%)였고 고향인 충청을 포함해 다른 지역에선 문 전 대표에게 밀렸다.(상세 내용은 중앙선거여론조사 공정심의위원회 누리집(nesdc.go.kr) 참고) 11월 조사 결과도 큰 틀에서 흐름이 유사하다. ‘새누리당·노령층·보수·대구경북’을 기반으로 한 전형적인 ‘늙은 보수’ 이미지다. 반 총장의 ‘박·반 연대’ 이미지에 더해 5월 하회마을과 김종필 전 총리 방문을 통한 ‘대구·경북+충청 연대론’ 띄우기가 정치적 확장성을 스스로 좁힌 ‘전략적 오류’일 수 있음을 시사한다.

반기문 총장은 박근혜 대통령과 ‘찰떡궁합’을 과시해왔으나, 국회의 대통령 탄핵소추안 가결 뒤 그는 뒤늦게 “신뢰가 배신당했다”며 박 대통령을 정면 비판했다. 사진은 2015년 5월20일 청와대를 예방한 반 총장을 박 대통령이 접견하는 모습. 청와대사진기자단
반기문 총장은 박근혜 대통령과 ‘찰떡궁합’을 과시해왔으나, 국회의 대통령 탄핵소추안 가결 뒤 그는 뒤늦게 “신뢰가 배신당했다”며 박 대통령을 정면 비판했다. 사진은 2015년 5월20일 청와대를 예방한 반 총장을 박 대통령이 접견하는 모습. 청와대사진기자단

친미외교관

2006년 7월18일 알렉산더 버시바우 당시 미국대사는 ‘반기문의 유엔 사무총장 당선이 미국에 유리하다’는 비밀 전문을 본국 정부에 보냈다.(위키리크스 2011년 4월28일 공개) 버시바우는 이 전문에서 반 총장을 “매우 유능한 외교관”이자 “천성적으로 미국의 모든 것에 동조적(naturally sympathic to all things American)”이라고 평가했다.

반 총장이 미국한테만 나긋나긋한 건 아니다. 그는 사람을 모질게 대하지 않기로 유명하다. 외교장관 때 휴일에 과장을 관사로 불러 보고를 받고는 “수고했어. 쉬는 날 정말 미안해”라고 했다 한다.(외교부 국장급 간부①) 그래서 ‘적이 없는 사람’, 정확히는 “적을 만들고 싶어하지 않는 사람”(전직 외교부 장관)이라는 평이 많다. 외교부 북미국장 시절 부친상 때 각계의 조화가 100개를 훌쩍 넘긴 일화가 시사하듯 마당발이다.(외교부 국장급 간부②) 반 총장은 평생을 외교관으로 지냈다. 버시바우가 2006년 비밀 전문에서 “반 장관은 한국 엘리트 교육의 산물이며 한국 외교부 시스템에서 벗어나 본 적이 없다”고 평했을 정도다.

‘예스맨·외교관’ 기질은 반 총장의 ‘정치적 약점’이다. “외교관은 정치와 캐릭터가 맞지 않는다. 정치는 돌다리가 없어도 물에 빠지면서도 건너가야 하는 것인데 외교관은 돌다리를 두드리고도 안 건너간다.”(이해찬 전 총리, 6월5일 재미동포 간담회) 역대 대통령을 깊이 분석해 ‘한국 정치의 책사’로 불리는 전직 장관은 “직업 외교관은 후천적으로 길러진 특성이 있다. 외교관은 본국과 주재국 사이의 가교 구실을 하는 사람이다. ‘제3자 의식’이 있다. 외교관은 국가를 대표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아무것도 책임지지 않는 사람이다. 대통령을 하기에 적합하지가 않다”고 말했다.

반 총장의 측근들은 “10년 전의 반기문이 아니다”라며 ‘외교관 불가론’에 손사래를 친다. 하지만 반 총장을 잘 아는 전직 외교부 장관은 이런 평을 내놨다. “대통령은 한국에서 가장 중요한 결정을 일상적으로 하는 사람이다. 결정은 ‘적’을 만든다. 어떤 결정이든 이해관계가 엇갈리는 집단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반 총장은 적을 만들기를 싫어한다. ‘결정은 적을 만든다’는 정언명제를 기꺼이 감당할 캐릭터가 아니다. 사람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조기대선

반 총장의 “대한민국 발전에 도움이 된다면 제 한 몸을 불살라서라도 그걸로 갈 용의가 있다”는 발언(20일 한국 특파원단 간담회)을 모든 언론이 ‘사실상의 대선 출사표’로 대서특필했다. 이어진 “어떻게 할 수 있느냐는 귀국 뒤에 각계 국민들을 만나서 말씀을 들어보고 결정을 하겠다”는 단서는 가벼이 다뤘다. 신중하게 곱씹을 필요가 있다. ‘정교하게 기획된 정치적 수사’로 보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언론에 노출된 반 총장의 대선 출마 도우미는 대체로 외교관 출신이다. 반 총장의 멘토로 불리는 한승수 전 총리, 김숙 전 유엔대사, 김원수 유엔 사무차장 등이 대표적이다. 유력 대선 후보나 주요 정당과는 직접적 연계가 아직은 없다는 게 반 총장을 잘 아는 지인의 전언이다. 대선 출마 준비가 본격화하지 않았다는 방증이다.

반 총장한테 광화문 촛불집회와 국회의 대통령 탄핵소추에 따른 조기 대선 국면은 예상하지 못한 악재다. 지지율 하락세, ‘늙은 보수’ 이미지, 조직된 정치세력의 부재, 시간 부족 등 ‘4중고’다. 조기 대선은 반 총장한테 ‘검증 시간 단축’이라는 선물과 함께 ‘시간 부족’이라는 난제를 동시에 안겼다.

반 총장은 친박과 민주당을 제외한, 비박·국민의당 등 이른바 ‘제3지대’ 정치세력과 협력·연대를 도모할 것이다. 권력 분점을 전제한 개헌이 고리가 될 수도 있다. 그런데 비박엔 유승민, 국민의당엔 안철수라는 만만치 않은 대선 후보가 있다. 조정이 순탄할 리 없다. 정치인 출신이 아닌 반 총장이 주요 정치세력의 도움 없이 독자 신당 창당이라는 선택을 하기도 쉽지 않다. 임기가 3년 넘게 남은 국회의원들이 몸을 움직일 가능성이 높지 않기 때문이다. 해는 서산에 기우는데 갈 길이 멀다.

북한

반 총장은 재임 10년간 북한에 한번도 가보지 못했다. ‘북핵 문제 해결과 한반도 평화에 기여한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이라는, 정치적 폭발성이 강한 이미지를 대선 출마와 정치세력 구축의 동력원으로 활용하기 어렵게 된 것이다. 반 총장이 5월에 방한해 출마 의지를 내비쳤을 때 많은 이들이 “한국인 유엔 사무총장인 반기문이 10년 임기를 마칠 때까지 한번도 방북하지 못한다면 대선 출마는 헛꿈이 될 것”이라고 지적한 터다.(<한겨레> 5월31일치 3면) 반 총장은 귀국 길에 중국을 거쳐 방북해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을 만나는 방안을 추진했으나 중국 정부의 부정적 반응으로 무산됐다는 얘기가 있다. 물론 반 총장 쪽은 이를 부인한다.

귀국보고회

반 총장은 1월15일께 귀국할 예정이다. 귀국 직후 전국을 돌며 ‘유엔 사무총장 10년’을 알리는 대중 강연을 추진하고 있다고 한다. ‘귀국 보고회’를 내세운 ‘강연 정치’다. 이를 통해 지지세가 다시 상승하는지, 자신을 중심으로 정치세력을 재조직할 수 있을지 가늠하리라는 게 반 총장을 잘 아는 이의 귀띔이다. “귀국 뒤 각계 국민을 만나 말씀을 듣고 결정하겠다”는 발언의 속내다.

지지율은 오르지 않고 정치세력 결집도 여의치 않다면? “정치하는 사람은 절벽에서 뛰어내려 밑에 물이 있으면 살고 아니면 죽는 그런 결정을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반기문은 그런 사람이 아니다. 절벽 아래에 물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해야 뛰어내릴 것이다. 반 총장이 속으로 ‘어세스’(assess·평가)하며 마지막까지 상황을 볼 것이다. 지금으로선 반 총장이 대선판에 뛰어든다고 봐야겠지만, 마지막 순간에 접을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다.” 반 총장을 잘 아는 전직 외교장관의 진단이다. 평생 ‘성공담’을 이어온 ‘인간 반기문’한테 ‘결정적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이제훈 기자 nomad@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