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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1994년에도 '막말 성직자 전광훈'이 있었다
글쓴이 : 시냇물  (121.♡.55.82) 날짜 : 2019-06-14 (금) 13:47 조회 : 3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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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광훈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 대표 회장처럼 성직자 신분을 무릅쓰고 주사파 논쟁 혹은 종북 논쟁을 일으킨 인물이 있다. 제1차 북·미 핵위기 와중에 김일성 북한 주석이 사망한 1994년 한여름을 주사파 논쟁으로 뜨겁게 달군 박홍 서강대 총장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그는 가톨릭 신부였다.

그해 7월 18일 박홍은 대학 총장 14명과 함께한 대통령과의 점심 자리에서 '주체사상이 대학가에 만연해 있다'는 주장을 펼쳤다. 주돈식 청와대 대변인이 공개한 그의 발언 요지 일부는 아래와 같다. 1994년 7월 19일자 <경향신문>에 실린 내용이다.
 
"주체사상과 '우리식 사회주의'가 제한된 (숫자의) 학생들이지만, 생각보다 깊이 침투되어 있다. 북한은 학원 안에 테러조직 등 무서운 조직을 만들고 있어, 한두 사람이 섣불리 앞서 나가다가는 이런 조직에 부딪혀 상처를 받는다. 선량한 학생들은 사상적 방황을 하다가 주사파에 말려든다. 다음 학기에도 학생들은 새로운 이슈를 갖고 나온다. 북에서 이미 다 지시를 내려놓았다. 우루과이 라운드 반대와 미군기지 반납 서명운동을 하도록 북에서 지시했다. 그 증거를 내가 가지고 있다. 일부 학생들은 완전히 김정일에 장악되어 있다."
 
 언론에 대서특필 된 박홍의 발언. 1994년 7월 19일자 ><경향신문 >.
▲  언론에 대서특필 된 박홍의 발언. 1994년 7월 19일자 <경향신문>.
ⓒ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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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홍은 증거가 있다고 말했다. 베이징에서 만난 김일성대학 학생회장이 들려준 이야기가 그가 말한 증거였다. 이후에도 그가 제시한 증거들은 대개 다 그런 식이었다. 증거라고 하기엔 너무도 빈약했지만, 그의 발언은 위력을 발휘하며 한국 사회를 논쟁의 소용돌이로 몰아넣었다.
  
지난 6월 5일 시국선언문을 발표한 전광훈 한기총 회장은 "문재인 정권은 그들이 추구하는 주체사상을 종교적 신념의 경지로 만들어 청와대를 점령하고 검찰·경찰·기무사·국정원·군대·법원·언론 심지어 우파 시민단체까지 완전 점령하여 그들의 목적지를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다"라고 주장했다.

말도 안 되는 주장에 대통령까지 동조

박홍 신부도 그런 식으로 발언했다. 처음에는 대학생들 중 주사파 200~300명이 있다고 주장했던 그는 그 뒤 '운동권·군대·대학·국회·행정부·문화계에도 광범위하게 침투해 있다'고 주장하면서 논란을 키워 나갔다. 검찰 조사 때는 '여야 국회의원 보좌관 대다수가 주사파'라는 진술도 했다. 야당에만 750명 정도의 주사파가 있다고도 주장했다.

당시 유행하던 대중가요가 있다. 1993년 발매된 가수 신신애의 <세상은 요지경>이다. "야이 야이 야들아 내 말 좀 들어라/ 여기도 짜가, 저기도 짜가, 짜가가 판친다"는 가사가 인상적인 노래다. 이 노랫말처럼 박홍은 '여기도 주사파, 저기도 주사파, 주사파가 판친다'는 주장을 쏟아냄으로써 한국인들의 머릿속에 주사파라는 세 글자를 강하게 새겨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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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거도 없는 말들을 무책임하게 쏟아내다 보니, 앞뒤가 맞지 않아 스스로의 신뢰도를 떨어트리는 일도 있었다. '야당에 750명의 주사파가 있다'고 했다가 야당이 발끈하자 '야당뿐 아니라 언론·종교계까지 포함해서 750명이라는 말이었다'며 발뺌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야당에 이어 언론계의 비판까지 자초하게 됐다.

신뢰성의 위기에 직면하자 그는 몇 걸음 물러서는 모습을 보였다. '주사파의 99.95%는 공산주의자가 아니다'라면서 '이들이 북한에 이용 당하지 않게 하려는 충심에서 나온 발언'이라고 말했다. 주사파 99.95%가 아직까지는 북한에 이용 당하지 않은 상태라며 자기 발언을 수습하려 한 것이다.

 
 1994년 7월 19일자 ><경향신문 >에 실린 박홍의 사진.
▲  1994년 7월 19일자 <경향신문>에 실린 박홍의 사진.
ⓒ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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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과정에서 웃음을 자아내는 해프닝도 있었다. 자신에게 동조하는 여당 대변인을 겨냥해 '저 사람도 지금은 아니지만 예전에는 주사파였다'라고 폭로하는 일이 벌어졌다.

'김정남 청와대 수석비서관을 비롯한 일부 비서관의 사상과 전력에 문제가 있으니 경질해 달라'고 요구하는 당시 민주자유당 손학규 대변인을 겨냥해 박홍은 '현재 주사파이기를 포기하고 각 분야에서 일하는 사람 중에 손학규·제정구·이부영 의원이 있다'고 폭로했다.

누가 들어도 말도 안 되는 주장이었지만, 놀랍게도 그의 발언은 나라 전체에 충격을 주는 데 그치지 않고 국가 공권력을 움직이는 괴력을 발휘하는 단계로 나아갔다. 김영삼 대통령까지 나서서 그의 발언에 동조했다. 경찰·검찰·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 지금의 국정원)까지 덩달아 나서서 힘을 실어주기 시작했다.

박홍이 거론한 이른바 '주사파 교수들'에 대한 안기부 수사도 있었다. 이때 피해를 입은 대표적 학자가, 여성가족부 장관(2017.07~2018.09)을 지낸 정현백 당시 성균관대 교수다. 그는 북한 자금을 받았다는 혐의로 체포됐다. 하지만 증거가 없어 결국 무혐의로 풀려났다.

박홍의 허술한 주장이 먹혀든 이유

지금의 전광훈 목사는 문재인 대통령의 하야를 촉구하는 등의 방법으로, 청와대 앞에서 기자회견을 여는 등의 방법으로 '2019년판 박홍'의 역할을 하고 있다. 하지만 그가 박홍과 다른 점이 있다. 박홍처럼 청와대를 비롯한 국가기관들의 지원 사격을 받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박홍은 대통령과 척을 지는 게 아니라 대통령의 지지를 받으며, 또 청와대 앞에서 기자회견을 여는 게 아니라 청와대 안에서 점심을 먹으며 주사파 논쟁을 터트렸다. 전광훈보다 훨씬 유리한 환경에서 논쟁을 이어갔던 것이다. 전광훈은 보수세력이 권력을 잃은 상태에서 논쟁을 일으켰고, 박홍은 보수가 권력을 잡은 상태에서 싸움을 벌였다는 점이 그런 차이를 만들어냈다.
 
 1994년 7월 19일자 ><경향신문 >에 보도된 7월 18일의 청와대 오찬.
▲  1994년 7월 19일자 <경향신문>에 보도된 7월 18일의 청와대 오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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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박홍의 주장도 전광훈만큼이나 허술하기 짝이 없었다. 기회 있을 때마다 '증거가 다 있다'고 했지만 쓸 만한 증거는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도 박홍의 주장이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가 민주자유당 집권기였기 때문만은 아니다. 엉터리 같은 주장일망정 보수세력이 그의 발언을 중심으로 강한 응집력을 보여줄 만한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보수세력이 박홍을 중심으로 똘똘 뭉친 것은 그들의 '위기감'이 이만저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지금과 달리 보수세력이 정권을 잡은 상태였는데도, 그들의 두려움은 상당 수준으로 고조돼 있었다. 그런 정서가 '박홍 현상'을 낳은 핵심 요인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 이전의 민중항쟁들과 비교할 때 1987년 6월항쟁이 갖는 특징이 있다. 3·1운동, 4월혁명, 5·18 광주항쟁과 달리, 6월항쟁 등은 동서 냉전구도가 급속히 와해되는 탈냉전과 비슷한 시점에 발생했다. 6월항쟁 이후에는 독일 통일(1990)과 소련 붕괴(1991)로 탈냉전이 본격화되면서 이념대결 구도가 계속 약해졌다.

이로 인해 한국은 안으로는 민주화 확산과 밖으로는 탈냉전 확산이라는 이중의 상황에 직면하게 됐다. 이 때문에 한국은 변화를 강요받지 않을 수 없게 됐다. 민주주의 억압과 반공 논리에 힘입어 이 땅을 지배해온 보수세력을 위협하는 현상이 비슷한 시기에 나라 안팎에서 등장했던 것이다.

보수세력의 눈에는 세상이 말세처럼 보일 만한 일들이었다. 진보세력의 역량 증대로 그들의 권력 상실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었다. 이로 인해 보수세력이 두려움을 품고 있는 상황에서, 진보세력을 주사파나 친북세력으로 매도하는 목소리가 뜻밖에 종교계에서 튀어나왔다.

'여기도 주사파, 저기도 주사파, 주사파가 판친다'는 신부의 목소리가 청와대 점심 자리에서 갑자기 울려퍼졌다. 정치인이나 학자가 아닌 성직자한테서 나온 소리라 그 반향은 한층 더 강력할 수밖에 없었다.

아돌프 히틀러 사례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위기감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이성적이고 짜임새 있는 주장보다 감정적이고 허술한 주장에 쉽게 매혹되고 동조하는 경향이 있다. 박홍의 말도 안 되는 주장들이 진보세력에 대한 공격으로 이어질 수 있었던 것은 보수가 정권을 잡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보수 진영의 위기감이 심했기 때문이다.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의 논문 <탈냉전 이후 한국적 매카시즘의 탄생>에 아래와 같은 대목이 있다. 김일성 조문 문제와 같은 시점에 발생한 박홍 현상의 시대적 배경을 설명하는 부분이다.
 
"한국에서의 매카시즘은 세계사적으로 탈냉전의 과정이 일어나고 국내적으로 민주화가 이루어진 이후에 가서 본격화되었다. 탈냉전과 민주화는 냉전적 보수세력들에게 위기감을 주었고, 이들의 위기감은 보수 언론을 통해서 적극적으로 표출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발생한 조문 사건과 박홍 총장의 주사파 발언은 한국 사회에 큰 파문을 던졌다. 두 사건 모두 자유민주주의 체제 하에서 형법상 문제가 되지 않은 발언에 대해 비판을 한 사건이었고, 한국 사회 내에서 북한을 추종하는 좌파에 대한 비판이 거세게 일어나는 계기가 되었다."
-한국역사연구회가 2014년 발행한 <역사와 현실> 제93호.
 

박홍은 민주화와 탈냉전으로 보수세력의 위기감이 극대화된 상태에서 주사파 논쟁을 일으켰다. 그래서 엉터리 같은 주장들이 보수세력의 호응을 받으며 돌풍을 일으키고 한국 사회를 흔들어 놓을 수 있었다.

보수세력의 입지가 좁아진 결정적 이유 '촛불혁명'

지금의 전광훈도 비슷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논쟁을 제기했다. 촛불혁명으로 인해 민주화가 다양한 분야로 한층 더 확산될 뿐 아니라, 북미정상회담으로 인해 한반도 탈냉전이 급진전되는 상황에서 '제2의 박홍'이 되어 주사파 세 글자를 입에서 쏟아내고 있다. 보수세력의 이념적 기반이 급격히 흔들리는 상황에서 '박홍 2'가 되어 등장한 것이다.

이는 전광훈이 제기한 논쟁이 그 본인에 의해서건 동조자들에 의해서건 앞으로도 상당 정도 지속될 가능성이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시대적 배경이 그런 논쟁의 확산을 조장하기에 유리하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박홍과 달리 전광훈과 동조자들 앞에는 불리한 조건이 놓여 있다. 6월항쟁은 보수정권을 무너트릴 정도의 위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그래서 박홍은 보수세력이 여전히 집권하는 유리한 상태에서 주사파 논쟁을 일으킬 수 있었다.

이와 반대로 촛불혁명은 보수정권을 무너트리는 위력을 보여주었다. 미투운동과 갑질 문제 등에서 알 수 있듯 촛불혁명의 여파는 우리 사회의 민주화를 한층 더 확산시키는 방향으로 사회 각계에 확산되고 있다. 이로 인해 보수세력의 입지가 사회 곳곳에서 좁아지고 있다.

그래서 예전과 같은 보수정권의 출현이 앞으로는 점점 더 힘들어질 수밖에 없다. 앞으로도 계속해서 보수세력은 존재하겠지만 박근혜 정권 같은 보수정권은 앞으로는 출현하기가 더 어려워질 수밖에 없다. 새로운 시대에 맞는 보수가 아닌 한, 그럴 수밖에 없다.

이는 '옛날 보수'의 가치를 추종하는 전광훈과 동조자들이 박홍보다 불리한 조건에서 논쟁을 일으킬 수밖에 없음을 의미한다. 집권 세력의 후원을 받기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음을 뜻한다. 청와대에서 점심을 먹으며 주사파 논쟁을 꺼내든 박홍과 달리, 청와대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며 주사파 논쟁을 벌일 수밖에 없는 전광훈의 모습이 '옛날 보수'의 한계를 상징적으로 반영한다고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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