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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조선 초대 교회들의 자주성 /조헌정
글쓴이 : 시냇물 날짜 : 2018-06-14 (목) 20:44 조회 : 636

조선 초대 교회들의 자주성

기사승인 2018.06.13  16:5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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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교회의 뿌리를 찾아서(1)

Edward Hallet Carr는 1962년에 펴낸 『역사란 무엇인가』에서 ‘역사란 과거와 현재의 대화’ 라는 유명한 말을 했지만, 역사가 과거와 현재의 대화가 되려면 역사가 바르게 정의됨은 물론, 현재에 적용될 가치를 찾아내 그것을 지켜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는 말하기를 ‘역사의 이름에 부끄럽지 않은 역사는, 역사 자체의 방향감각을 찾고 받아들이는 사람들만이 쓸 수 있는 것이다. 미래의 진보가능성에 대한 신념을 상실한 사회는 과거에 자기들이 이룩한 진보에 대해서도 급속히 무관심하게 될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두 번의 판문점 남북정상회담에 이어 조미정상회담을 앞두고 통일을 바라보며 분단 이전의 조선교회의 모습을 앞으로 10주간에 걸쳐서 돌아보고자 합니다.

가톨릭을 포함하면 교회의 역사는 훨씬 더 길어지지만, 흔히 개신교는 1885년 4월 4일 부활주일에 미국 북장로교의 언더우드, 북감리교의 아펜젤러 선교사가 이 땅을 밟았던 때를 시작으로 말합니다. 그런데 이는 옳은 견해는 아닙니다. 그 이전 백령도를 다녀가고 대동강에서 죽은 토마스 선교사와 로스 선교사의 영향으로 그들이 들어오기 전에 조선 땅에는 이미 개신교인들이 있었고, 고종 황실의 시의이며 미국의 공사관 공의의 직함을 갖고 있던 알렌 또한 실상은 선교사로서 그들보다 약 7개월 전에 먼저 들어와 있었습니다.

조선 최초 소래교회의 자주주체성

이 땅에 가장 먼저 세워진 황해도 장연의 소래교회의 역사가 이를 확실하게 반증합니다. 소래교회는 이 두 선교사가 들어오기 2년 전인 1883년 5월 16일에 첫 예배를 드립니다. 어떤 자료에는 1885년 6월 29일에 세워졌다는 기록도 나오지만, 이는 교회 개축 기념에 맞춘 조직교회의 출발을 말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 시작은 이러합니다. 인삼 장수였던 서상륜이 만주에 갔다가 장티푸스에 걸려 죽게 되었을 때, 영국인 선교사 맥킨타이어의 간호로 회복하게 되면서 복음을 받아들이고, 성경번역작업에 참여하여 처음 만들어진 우리말 쪽 복음서를 품에 안고 고향 의주로 돌아옵니다. 하지만 그는 국경에서 관헌에 적발되어 전도에 어려움을 느끼자 동생 서경조와 함께 당시 당숙이 살고 있던 장연 송천리로 옮겨와 복음을 전하며 소래교회를 세우게 됩니다.

▲ 1883년 사랑방으로 시작한 소래교회가 1895년에 세운 한옥 교회당

1년 만에 20여명의 교인들이 출석하는 교회로 성장했고 조선 땅에 도착한 언더우드 선교사는 이 소래교회 얘기를 들었고 방문을 합니다. 그때 교회는 교인들이 많아져 기와집으로 개축하고자 했을 때입니다. 그래 건축헌금과 교역자 사례비를 지원하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이때 교인들은 이 예배당은 조선의 첫 예배당이니 외국인의 재물은 받아들이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여 극구 사양하고 자립적으로 헌금을 모금했습니다. 요즘 남한교회의 신학이나 목회 상당부분이 미국교회를 따라가고 있는데, 이 소래교회의 신앙의 자주 주체 정신을 되살리는 교회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 소래교회는 8칸의 기와집으로 예배당을 개축했고, 그 이듬해 출석교인이 200여명이 되어 또 8칸을 증축했습니다. 전체 58 가구가 사는 마을에서 50 가구가 교회에 출석하는 놀라운 일이 생겨난 것입니다. 이후 소래교회는 선교사들의 한글교육장으로, 전도훈련장으로 때로는 동학군들의 피신처 등으로 활용됩니다.

왜 장연 사람들이 이렇게 빨리 예수 복음을 받아들이게 되었을까? 그 사회정치적인 배경을 잠시 생각해 봅니다. 성호 이익에 의하면 조선 3대 도적 혹은 의적으로 임꺽정·홍길동·장길산을 얘기하는데, 이 세 사람이 모두 황해도 구월산을 중심으로 활동을 했습니다. 곧 장연은 해주와 더불어 바로 이 구월산의 끝자락 동네에 있으면서 해안가에 위치하고 있어 이국 문화에 개방적이고 새로움에 대한 열망이 가득 차 있었던 것입니다.

마치 팔레스타인 땅의 끝자락에 놓여 있는 갈릴리와 같이 끊임없이 민중해방운동이 일어난 곳입니다. 후에 김구 선생 또한 이곳에 학교를 세우고 독립운동의 뿌리로 삼은 것을 보면 이곳이 바로 가난한 민중들의 한이 맺혀 있는 조선의 갈릴리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예수께서 자신의 무덤을 찾아온 여인들에게 ‘나는 먼저 갈릴리로 갈 것이니 너희도 그리 오라.’고 하셨던 그 장소가 바로 1900여년이 흐른 조선 땅에서는 황해도 장연 땅의 송천이 되었고 그 첫 공동체가 소래교회가 된 것입니다.

조선 최초의 세례 교인

조선에서 처음 세례를 받은 사람은 노도사로 알려져 있는데, 그는 고종의 시의였던 알렌의 집을 찾아갔다가 한문으로 된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을 발견하고는 이를 몰래 집으로 가져와 읽기 시작하면서 기독교의 진리에 접하게 되었고, 이후 언더우드 선교사로부터 성서와 교리서를 계속 빌려 읽으면서 선교사들만이 모였던 주일예배에 몇 차례 참석한 후 스스로 기독교 신앙을 갖기로 결정하여 1886년 7월18일 세례를 받습니다. 조선에서의 첫 세례자가 선교사에 의한 전도가 아니라 스스로의 의한 전도였다는 사실 또한 앞서 소래교회와 더불어 조선교회의 자주성을 다시 한번 확인합니다. 그리고 이때 세례식은 언더우드가 집례하고 아펜젤러가 보좌하는데, 장로교와 감리교 선교사가 함께 집례를 하였다는 사실은 오늘날 갈기갈기 찢어져 있는 남한교회의 모습을 되돌아보게 합니다.

조선 최초의 목사

흔히 조선 최초의 목사는 아까 얘기했던 서상륜과 서경조씨 그리고 길선주를 포함한 평양신학교 1회 졸업생인 7명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이는 장로교 목사로서 처음인 사람이고 조선 최초의 목사는 감리교의 김창식 목사로서 이들보다 6년이나 앞서 목사 안수를 받았습니다. 그러면 김창식 씨가 어떻게 소래교회를 세운 서상륜 형제보다 더 먼저 목사가 될 수 있었는가? 신학교를 졸업하지 않고 목사가 되는 것이 가능한가? 하는 질문이 생기는데, 그것은 목사안수에 대한 장로교와 감리교의 서로 다른 체제에서 기인합니다.

제가 미국에서 신학교를 다닐 때의 얘기입니다. 당시 한국에서는 4년제 신학대학 졸업만으로 목사 안수가 가능했지만, 미국에서는 3년제 신학석사를 졸업해야만 목사시험을 볼 자격이 주어집니다. 2학년 때인데, 같이 입학했던 미국인 친구가 자기가 지난 주에 목사 안수를 받았다는 것이에요. 나는 아무리 빨라도 2년이 더 있어야 되는데, 너무 놀랐지요.

무슨 이상한 교단에서 받았는가 하여 물어보았더니 미국감리교 연회에서 정식으로 받은 것입니다. 장로교와 달리 감리교는 본래 집사·장로라는 칭호를 평신도에게 주는 게 아니라, 목사에게 줍니다. 그래 처음 목사 안수를 받으면 집사목사(deacon pastor), 이후 7년이 지나면 장로목사(elder pastor)라 하여 정회원이 됩니다. 목사로서의 차이는 없지만, 연회 활동에 있어서는 차이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때 우리보다 나이가 조금 더 많은 흑인 동료가 옆에 있다가 말하기를 자기는 목사 안수 받은 지가 몇 년 되었다는 겁니다. 이 분은 신학교 졸업장이 없는데 이미 목사가 된 것입니다. 예전에는 백인들이 신학교 입학을 허용하지 않아 흑인 목사들끼리 협력하여 목회 훈련을 시키고 따로 안수를 주던 그런 관례가 계속 내려오고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도 미국 침례교는 개교회 차원에서 목사 안수를 주고 있고, 일본에도 그런 전통이 남아 있습니다.

그래 1901년 5월 14일, 선교사가 들어온지 6년만에 서울 정동교회에서 개최된 미국 감리교 한국선교회 연례회에서 김창식과 김기범 두 사람이 ‘집사 목사’로 안수를 받습니다. 두 사람 중 먼저 안수를 받은 김창식(1857∼1929)은 선교사들로부터 ‘조선의 바울’이란 칭호를 받은 한국 개신교 개척 시대의 전설적인 전도인이며 그에게 머슴 목사란 별명이 붙게 된 연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머슴에서 목사로

황해도 수안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김창식은 열다섯 되던 해에 무작정 가출을 합니다. ‘가진 것도 없고 배운 것도 없는’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머슴살이를 비롯해 마부, 지게꾼, 장돌뱅이 같은 밑바닥 일이 고작이었습니다. 15년 동안 전국 팔도 안 가본 데가 없을 정도로 떠돌아다닙니다.

스물 아홉이 되어 비로소 늦장가를 들어 남대문 안에 정착했을 때 그는 서울 장안에 떠돌던 흉흉한 소문을 듣게 됩니다. “서양 사람들이 조선 아이들을 데려다 지하실에 가둬 놓고 하나씩 잡아먹는다더라.” “예쁜 애들은 밤에 끼고 자고, 싫증나면 자기 나라에 노예로 팔아넘긴다더라.”는 소문입니다. 선교사들이 학교를 세우고 고아와 가난한 집 아이들을 가르치며 본격적인 선교 활동을 시작하자 이를 시기한 수구파가 선교를 방해하려는 목적으로 ‘헛소문’을 퍼뜨린 것입니다. 그래 흥분한 시민들은 선교사들이 운영하는 학교와 병원에 난입해 난동을 부려 한때 학교와 병원은 문을 닫았고, 종교 집회도 모일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이를 교회역사에서는 ‘영아 소동’(baby riot)이라 부릅니다.

이에 김창식은 선교사들이 조선 아이를 ‘잡는’ 현장을 잡겠다고 결심을 하는데, 이때 마침 한국에 나온 지 얼마 안 된 올링거(F. Ohlinger) 선교사가 사람을 구하고 있어 그 집에 ‘행랑 아범’이라고 불리는 머슴이 됩니다. 김창식은 예리한 눈길로 선교사 가족의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합니다. 그러나 그가 기대하던 만행은 볼 수 없었고 오히려 선교사 가족들은 그를 정중하고 예의 바르게 대합니다. 올링거 선교사는 물론이고 그의 친구 선교사들은 나라님(고종)과 자주 만난 다는데, 머슴에 불과한 그에게 보내는 눈길과 손길은 따뜻하기만 했습니다.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는 조선 양반들과 질적으로 달랐던 것입니다.

그래 ‘사람 대접’을 해 주는 선교사들에게 감동을 먹게 되자 기독교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고 이때 올링거 선교사는 마태복음 5장을 읽어보라고 쪽복음을 건네줍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로 시작하는 산상수훈은 그의 마음을 움직였고 올링거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았습니다. 위장 취업한 지 2년 만이었습니다.

조선 평양의 바울

그 후 김창식은 열성적으로 전도에 나섭니다. 1893년 의료 선교사 홀(W. J. Hall)과 짝이 되어 평양에 내려가 선교를 시작하였는데, 보수적인 평양에서 선교사가 전면에 나설 수 없어 그가 나서서 서문 밖에 선교사 사택과 병원, 학교와 교회 자리를 마련합니다. 그 일로 그는 평양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고 당시 평안 관찰사로 내려 와 있던 민병석은 선교사와 기독교를 아주 싫어한 수구파 인사로 평양에 기독교 확산을 막기 위해 1894년 여름 기독교인 체포령을 내립니다.

▲ 조선 평양의 바울이라 일컬어졌던 김창식 목사

그때 김창식을 비롯해 평양의 감리교와 장로교인 10여 명이 투옥되는 ‘평양 기독교도 박해 사건’이 일어납니다. 이에 미국 공사는 조선 정부에 강력 항의하였고, 이들은 1주일 만에 풀려납니다. 그런데 그때 배교를 거부한 김창식은 심하게 매를 맞았고 ‘거의 반 시체가 되어’ 실려 나옵니다. 당시 평양에서 이 사건을 목격한 홀 부인의 회고입니다.

“홀 박사가 서울에 있는 동료들에게 전보를 치자, 평양 관찰사에게 모든 기독교인들을 석방하고 또 선교사들을 보호하라는 지시가 내려졌습니다. 그러나 관찰사는 교인들을 사형수 감방에 가두고 마치 다음날 사형을 시킬 것처럼 겁을 주고는 교인들을 끌어내어 배교를 강요하였답니다. 그때 우리 용감한 김창식은 ‘사람보다 하느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응답하였고, 그로 인해 아주 심한 매를 맞았습니다. 그 무렵 평양 거리는 돌투성이였는데, 감옥에서 나온 직후에 돌 세례를 받으며 가까스로 우리가 있는 곳으로 돌아왔습니다. 우리는 그의 발밑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처럼 예수님을 위해 목숨을 내놓는 신실한 증인의 모습을 어디서도 찾아 볼 수 없었습니다.”

선교사를 부끄럽게 만든 김창식의 신앙 투쟁은 평양 사람들에게도 큰 영향을 끼쳤으며, 며칠 후 그를 매질한 관찰사는 선교사를 찾아와 사과하고 배상금을 물어야 했으며 얼마 후 그는 좌천됩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평양 주민들은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평양 관찰사의 위세도 선교사와 교회에는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기독교는 ‘치외법권’ 종교가 됩니다. 이 사건 직후 청일전쟁이 일어났고 평양은 청군과 일본군의 주전장(主戰場)이 되었고 이에 평양 주민들은 대부분 성 밖으로 피난 갔지만 김창식은 교회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일청전쟁 때의 일이다. 이 때 평양은 일·청 두 나라 군인의 전쟁터가 되었다. 전쟁이 시작된 지 얼마 후에 들은즉 중국 군사는 패하고 일병이 성중으로 들어온다 하여, 이 말을 들은 성중은 인심이 물끓듯하여 어찌할 줄을 모르고 피난하는 자가 무수하였다. 나는 하느님을 의지하는 가운데 조금도 두려워 아니하고 피난할 생각을 버리고 성중에 남아 있는 사람들의 영혼을 구원의 문으로 인도함이 나의 의무임을 깨달았다. 나는 또 성중의 남아 있는 사람들에게 육신의 위로까지 줄 기회가 있었음으로 그때부터 예수 믿는 사람이 많이 생기고 교회도 몇 곳에 새로 설립되었다.” <김창식, 『나의 교역생활』 (조선기독교창문사, 1927), 3쪽.>

그가 말한 ‘육신의 위로’란 전쟁 중에 교회로 피신한 사람들 혹은 성 밖으로 피신하면서 교회에 맡긴 피난민들의 짐을 안전하게 보호한 것을 의미합니다. 실제로 전쟁 중 청나라나 일본 군대는 ‘십자기’(十字旗)를 내건 예배당을 공격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병사들을 보내 보호 조치를 취하였던 것인데, 이는 교회를 공격함으로써 선교사를 파견한 미국과 영국 등 서구와 외교적 마찰을 일으킬까 우려한 때문이었습니다. 전쟁 중 십자기가 달린 교회는 양쪽 군대도 함부로 할 수 없는 ‘성역’이었습니다. 피난 갔다 돌아와 짐을 고스란히 돌려받은 평양 주민들이 교회를 보는 눈이 달라지기 시작합니다.

또 전쟁 후에 평양에 전염병이 창궐했습니다. 이때 홀 선교사와 김창식은 몸을 돌보지 않고 환자들을 돌보았고, 이때 홀 선교사는 병에 걸려 죽게 됩니다. 이런 헌신과 희생이 선교의 밑거름이 되어 훗날 평양은 ‘조선의 예루살렘’이라고 불리는 개신교의 중심지가 된 것입니다.

이후 김창식은 목회자 수업을 받고 1901년 한국 최초로 목사 안수를 받아 1924년 정년 은퇴하기까지 마치 사도 바울과 같이 영변, 수원, 해주 지방을 돌며 125개 교회를 개척하였고 48개 예배당을 건축합니다. 김창식은 머슴 출신으로 한국 최초 목사가 되었을 뿐더러 수많은 교회를 세운 사람이었습니다. 오늘날 남한 교회의 성장 이면에는 바로 김창식목사와 같은 헌신과 노력이 있었던 것이고, 사도행전의 초대교회와 같이 신분 차별의 벽을 깨뜨리고 민중을 보호하는 역할을 감당하였던 것입니다.

조선 최초의 최치량 장로와 백정 출신의 박성춘 장로

우리나라 최초의 장로였던 최치량 장로님(1854-1930)은 40여세 때에 여관을 운영하다 자기 집에서 있은 마펫 선교사 집회를 통해 예수를 영접하고 세례를 받아 평양 최초의 교회인 “장대현 교회”를 세우는 일에 일익을 담당하고 후에 오촌리로 이사하여 “오촌리 교회”를 세우고 이 교회에서 58세의 나이에 장로로 임직을 받습니다. 그는 이 교회를 헌신적으로 섬길 뿐 아니라 사재를 털어 경신학교를 세워 기독교전파와 민족교육에도 전력을 바쳤습니다. 당시 장로는 단지 교회의 지도자일 뿐만 아니라 민족의 지도자로서의 책임을 함께 담당하였던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 장로와는 전연 달랐던 것입니다.

그런데 동양의 예루살렘이라고 하는 평양에 최치량 장로가 계셨다면, 서울에는 그보다 1년 후에 장로로 임직을 받은 박성춘씨가 유명합니다. 박성춘은 1862년 서울 관자골(오늘날 종로구 관훈동)에서 백정의 아들로 태어납니다. 한번 백정은 영원한 백정이기 때문에 박성춘은 백정 마을에서 백정의 딸과 결혼해서 백정 아들을 낳습니다. 조선시대 때 최 하류 계층은 칠천(七賤)반으로 불리었는데 이는 포졸, 광대, 고리장(나무껍질을 벗겨 장을 만드는 사람), 무당, 기생, 갓바치(동물 가죽으로 신을 만드는 사람), 백정이 그들입니다.

그런데 백정은 이중에서도 가장 천한 신분으로 간주되었습니다. 백정은 무적자로 인구조사에서 제외되었고, 절대로 상투를 올려서는 안 되었습니다. 그러기에 망건이나 갓을 쓸 수가 없었습니다. 조선시대에 망건을 쓰지 않았다는 것은 미성년의 표시였기 때문에 아무리 나이 많은 백정일지라도 어린아이 취급을 당했습니다. 백정들의 가슴에 얼마나 큰 한이 있었겠습니까? 박성춘에게는 봉출이라는 아들이 있었는데, 아들만은 백정 신세를 면하게 해주기 위해서 당시 무료로 학생들을 가르치던 곤당골(서울 중구 을지로 1가)에 있는 예수교 학당에 아들을 보냅니다.

당시 곤당골에는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 사무엘 무어가 (1893년 6월에) 교회 안에 학당을 세우고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이때 박성춘은 예수를 믿지 않았기에 아들에게 일요일의 예배 참석은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1894년에 동학혁명과 청일전쟁이 일어나면서 콜레라가 창궐합니다. 얼마나 심했는지 하루에 삼백 명이 죽어서 성문 밖으로 실려 나갔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때 박성춘도 전염병에 걸려 죽을 위기에 처하게 됩니다. 무당을 불러서 굿을 해보았지만 전혀 차도가 없습니다. 그런데 차에 하루는 아들 봉출이가 낯선 외국인 두 사람을 데리고 왔는데 곤당골 교회의 사무엘 무어 목사와 제중원 담당 의사였던 에비슨이었습니다.

당시 에비슨은 고종황제의 주치의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황제의 주치의가 인간 취급도 받지 못하던 백정마을의 자기 집까지 들어와 그의 몸에 손을 대면서 치료를 해주는 일에 너무나도 감동을 받아 박성춘은 아들 봉출이가 교회에 나갈 수 있도록 허락하고, 자신의 두 딸도 에비슨이 시작한 여학교로 보냅니다. 그리고 자신도 곤당골 교회에 나가면서 1895년 초에 무어 목사에게 세례를 받습니다.

복음의 힘: 500년 신분 차별의 벽을 허물다

그런데 이로 인해 곤당골 교회에 문제가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당시 곤당골 교회의 교인이 20명이었는데 갑자기 사람들이 교회에 안 나오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교인들 중에는 정부의 관리들이 있었는데 그들이 더욱 교회에 발을 끊었습니다. 당시 곤당골 교회는 양반위주의 교회였는데, 중인은커녕 상놈도 아닌, 천민 중에 천민이었던 백정이 교회에 나와 같은 자리에 앉아있으니 당시 양반들로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 500년간 이어져온 신분제의 벽을 허문 곤당골 교회

이들은 박성춘이 교회에 나오지 못하도록 무어목사에게 압력을 넣었습니다. 하지만 무어 목사는 하느님 앞에서는 모두가 평등하다면서 이를 거절합니다. 그러자 이들은 양반자리, 백정자리를 따로 구분하자는 제안을 합니다. 무어 목사는 이 또한 교회에서는 도저히 있을 수없는 일이라고 또 거절합니다. 결국 곤당골 교회의 양반들이 따로 나가 교회를 세우는데 그게 ‘홍문수골 교회’입니다.

자연히 ‘홍문수골 교회’는 양반교회가 되었고, 곤당골 교회는 백정과 상민만 남은 교회가 되었습니다. 이때 박성춘은 천한 백정을 위해서 애쓰는 무어 목사에게 감동을 받아 열성적으로 전도하였는데, 얼마 되지 않아 곤당골 교회를 백정들로 가득 채우게 됩니다. 이후 3년간 곤당골 교회는 계속 부흥하게 되고, 반면에 ‘홍문수골 교회’는 점차 쇠락의 길을 걷게 되자 분리한지 3년 만에 1898년 다시 두 교회가 합쳐져서 지금의 인사동에 있는 ‘승동교회’가 탄생하게 됩니다. 다른 한편 그해 박성춘은 독립협회가 주관한 만민공동회에 연사로 나서 “양반사족만이 아니라 사농공상의 모든 신분을 초월하여 모든 백성을 국가의 기둥으로 삼아야 국가의 힘이 더욱 공고해 질 수 있다.”는 발언을 하여 세인들의 주목을 받기도 합니다.

당시 장로는 세례 받은 지 1년이 지나고 만 30세 이상으로 교인의 3분지 2 찬성이 필요했는데, 박성춘이 승동교회의 초대 장로로 뽑힙니다. 이후 그는 노회 임원직도 맡아 지도력을 발휘하여 전국에 수십 개의 백정 교회가 세워지는데 큰 역할을 하게 됩니다. 그럴 뿐더러 당시 내각총서로 있던 유길준에게 장문의 탄원서를 보내 ‘백정 차별 금지법’을 공포하게 하고 백정들이 ‘갓과 망건을 쓰고 다닐 수 있게’ 허락해 달라고 요구합니다. 당시 ‘갓과 망건’은 인간됨의 상징이었던 것입니다.

결국 박성춘의 요구가 관철이 되었고 박성춘은 과거 500년간 못 쓰던 망건과 갓을 제일 먼저 썼던 백정이 되었습니다. 처음 갓을 쓰는 날 얼마나 기뻤던지 잠을 잘 때도 갓을 벗지 않고 잤다고 합니다. 당시 교회는 이렇게 사회의 차별을 깨는 진보와 해방의 선도적 역할을 감당했던 것입니다. 바로 이런 점이 교회가 민중 속으로 파고들고 성장하게 된 배경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박성춘이 승동교회에서 장로가 된지 3년이 지나 흥선대원군의 친척으로 왕손이었던 이재형이 또한 장로가 됩니다. 조선 역사에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백정과 왕손이 동등한 입장의 당회원이 된 것입니다. 어쩌면 이는 세계 역사에서도 드문 일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는 기독교 복음이 아니었다면 도저히 불가능한 일입니다.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 안에서 남자나 여자나 주인이나 노예나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다 하나라고 했는데,” 바로 이 말씀을 실천한 것이고, 오늘 마가복음 본문 말씀과 같이 핏줄을 뛰어 넘어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 나의 어머니이고 자매요 형제라고 하는 예수님의 말씀을 실천한 것입니다.

예수 신앙과 민족 사랑

또한 박성춘의 아들 봉출은 열심히 공부하여 세브란스 1회 졸업생으로 1907년 조선 최초의 의사 가운데 한 사람이 되는데 그가 박서양입니다. 박서양은 개화기의 상징적 인물로서 1917년 간도로 이주해 병원을 세우고 조선인 유일의 서양의사로 활동하면서 또한 민족교육기관인 숭신학교를 세워 학생들을 가르쳤는데, 이 학교는 후일 만세운동을 벌이는 등 일제와 맞서다 폐교를 당합니다. 이후 그는 간도 지역에 세워진 독립운동 조직인 대한국민회의 일원으로 항일운동을 펼쳐 대한국민회 군사령부의 유일한 군의(軍醫)로 일하였고 장로가 되어 교회 또한 열심히 섬겼습니다.

박서양을 연구해 온 연세대 의사학과 박형우 교수는 “전통 사회에서 억압받던 신분 출신이면서 성공한 의사였던 박서양이 식민지 현실을 외면하지 않고 이를 극복하고자 독립운동에 나선 것은 수많은 조선의 엘리트들이 근대 문명을 수용한다는 명분 하에 일제의 침략을 용인해온 것과 대조적”이라고 평가합니다. 아버지 박성춘 장로와 아들 박서양장로는 복음을 통해 신분상승을 이루었지만 개인의 영달에 머물지 않고, 낮은 곳으로 흐르고 흘러 의술과 교육을 통해 조선 사회를 진보와 해방의 길로 인도한 진정한 예수를 따르는 신앙인들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 기독교인들이 귀감으로 삼아야 할 사람들입니다.

조헌정 choshalom@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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