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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인간이 대면한 진리…죽음이 실종된 세계야말로 죽음이다
글쓴이 : 시냇물 날짜 : 2018-01-11 (목) 14:12 조회 : 3618

조현설의 아시아 신화로 읽는 세상](8) 인간이 대면한 진리…죽음이 실종된 세계야말로 죽음이다

ㆍ죽음은 어디서 왔나

에서 저승차사들이 망자를 재판하기 위해 데리고 가는 장면. 영화는 사후 49일 동안 7번의 재판을 통과한 망자만이 환생할 수 있다고 그린다." style="background: none 0px 0px repeat scroll transparent; border: none; margin: 0px; outline: none 0px; padding: 0px; vertical-align: top; max-width: 710px;">

죽음 이후의 세계인 저승을 다룬 영화 <신과 함께>에서 저승차사들이 망자를 재판하기 위해 데리고 가는 장면. 영화는 사후 49일 동안 7번의 재판을 통과한 망자만이 환생할 수 있다고 그린다.

우리 무속신화를 끌어와 그린 웹툰 <신과 함께(저승편)>(2010)를 바탕으로 제작된 영화 <신과 함께-죄와 벌>이 관객들을 끌어모으고 있다. 영화는 죽음 이후 만나게 된다는 저승에 관한 상상을 다채롭게 펼쳐 놓는다. 29명을 저승으로 몰아넣은 어처구니없는 화재가 일어난 게 불과 며칠 전이다. 죽음은 느닷없이 찾아오는 ‘손님’이다. 이 손님에 대해 신화들은 어떤 이야기를 하고 있을까? 한 해의 마감을 앞두고 죽음의 신화를 읽어보는 것도 뜻깊을 듯하다.

우리는 왜 죽을 수밖에 없을까? 신의 명령을 거역해서, 혹은 원죄 때문에? 그건 기독교를 비롯한 종교의 설명이다. 신화의 이야기는 다르다. 어룬춘(영어로는 Oroqen)족의 신화를 먼저 들어보자. 어룬춘족은 내몽골이나 흥안령산맥 일대에 거주하는 소수민족이다.

옛날부터 전해지는 말에 따르면 인간은 본래 천신 언두리마파가 가져온 거석 다섯 개로 빚은 돌사람이었다. 천신이 석인(石人)의 두 눈을 어루만지자 눈동자가 움직이기 시작했고, 콧구멍을 뚫자 후각이 생겨났다. 턱이나 목도 천신이 어루만지자 자유롭게 움직였다. 배꼽은 만지지 않았기 때문에 아무 쓸모도 없게 되었다. 언두리마파는 다섯 석인의 양 옆구리를 손바닥으로 쳐서 자국을 남겼다. 사람의 늑골은 이렇게 만들어졌다고 한다. 

다섯 석인은 천신을 떠나 함께 생활했다. 그런데 석인은 죽지 않았으므로 땅 위에는 사람이 넘쳐났다. 그래서 언두리마파는 손으로 때리고 발로 차서 석인들을 다 죽여 버렸다. 그런 다음 천신은 이번에는 진흙으로 사람을 만든다. 진흙은 돌처럼 단단하지 못했기 때문에 세상에 점차 죽음이 생겨났다. 이 이야기는 소흥안령산맥 일대의 어룬춘족 수렵민들 사이에 전해지고 있다.

어룬춘 창세신화는 두 단계의 인류 창조에 대해 말하고 있다. 죽지 않는 첫 번째 인류와 죽는 두 번째 인류가 그것이다. 두 번째 인류가 죽게 된 것은 순전히 재료 때문이다. 단단한 돌이 아니라 형태가 변하는 무른 진흙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여러 단계를 거쳐 창세신이 현생 인류를 창조하는 신화는 적지 않다. 중국 윈난성에 사는 이족의 창세신화 <므이꺼>에 따르면 인류는 외다리 소인, 거인, 수안인(竪眼人), 직안인(直眼人) 네 단계에 걸쳐 창조된다. 창세신은 실패를 모르는 신이 아니다. 어룬춘족의 창세신 언두리마파도 그랬다. 그는 돌로 인간을 만들었다가 파괴한다. 죽지 않았기 때문에 문제가 생긴 것이다. 에덴동산의 아담이 야훼의 금지를 잘 지켰더라면 같은 문제가 발생하지 않았을까? 어룬춘 신화는 죽음의 기원을 이야기하면서 동시에 영생이 심각한 문제라는 인식을 보여준다.

이 주제를 아주 잘 소화하고 있는 신화가 있다. 네팔 구룽(영어로는 Gurkhas)족이 전승하고 있는 옛날 이야기다. 이야기의 주인공은 가난한 나무꾼 노인이다. 조연으로 등장하는 인물에 의인화된 ‘죽음’이 있고, 질서의 신 ‘비슈누(Vishnu)’가 있다. 비슈누가 출연하는 것을 보면 이 이야기는 틀림없이 힌두신화의 자장 안에 있다〔툴라시 디와사(Tulasi Diwasa)의 <네팔의 민담(Folktales of Nepal)>(1993)을 바탕으로 두 소설가가 <백 개의 아시아 1>(김남일·방현석, 아시아, 2014)에 풀어 놓은 이야기를 재정리함〕. 

노인은 어느 날 땔감을 한 지게 해서 돌아오다가 잠시 쉬었다. 그런데 다시 지게를 지려고 하자 꼼짝도 하지 않았다. 노인은 힘들다고 투덜대며 ‘죽음은 뭘 하느라 나 같은 늙은이를 안 데려가는 거냐’고 중얼거렸다. 그때 어떤 인물이 나타나 ‘왜 나를 찾느냐’고 묻는다. 자신이 바로 ‘죽음’이라면서. 늘 곁에서 죽음이 우리의 말과 숨소리를 듣고 있다는 뜻이다.

노인은 떨리는 마음을 간신히 누르고 둘러댄다. 지게가 무거워 들어달라고 불렀을 뿐이라고. 죽음이 떠나려 하자 노인은 자신이 얼마나 더 살 것인지 물었다. 죽음은 바로 ‘5년’이라고 대답한다.

노인은 다음날 숲에 들어가 거대한 나무를 골라 속을 파낸 다음 그 안에 집을 짓기 시작했다. 바람 한 터럭도 들어오지 못하게 꼬박 5년 동안 집을 지었다. 몇 층인지 알 수도 없었다. 죽음이 다시 찾아오자 노인은 자신이 만든 집이나 한번 보고 가자고 꾄다. 죽음은 나무집의 정교함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죽음이 집 구경에 정신이 팔린 사이 노인은 문을 잠그고 제 집으로 돌아가 버렸다.

죽음이 갇히자 세상에서 죽음이 사라졌다. 산 사람이 넘치자 굶주림이 아우성쳤다. 신들은 경악했다. 회의를 했지만 대책을 내놓지 못했다. 그때 비슈누가 나선다. 모든 것을 원상태로 되돌려 놓겠다고 장담하면서. 

비슈누는 노인으로 변장하고 문제의 노인을 찾아갔다. 비슈누는 노인에게 사는 게 지겹지 않느냐고 물었다. “죽고 싶어도 이젠 죽을 수가 없다오.” 비슈누는 삶에 지친 노인과 함께 죽음을 찾아 나선다. 노인이 나무집의 문을 열자 백발이 된 죽음은 간신히 목숨만 부지하고 있었다. 비슈누가 성수(聖水)를 뿌리자 죽음은 드디어 의식을 되찾았다. 

죽음: (울부짖으며) 신이여, 생명을 유지할 목적이라면 어떤 짐이라도 지겠나이다. 그러나 이 짓은 죽어도 못하겠나이다. 

비슈누: 왜 용기를 잃었느냐? 생명이 지속되는 한 책임을 다해야 한다. 은퇴는 안된다. 그 대신 그대가 일하는 데 꼭 필요한 것이 무언지 말해보아라. 그 부탁은 들어주겠노라.

죽음: (곰곰이 생각하더니 깊은 숨을 내쉬며) 제 모습이 사람들한테 보여 이 지경이 된 것이옵니다. 그러니 저는 세상을 보지만 세상은 저를 보지 못하도록 만들어 주십시오.

비슈누: (고개를 끄덕거리며) 알겠노라. 

좀 극적인 장면이어서 두 존재의 대화를 연극적으로 구성해 보았다. 이 사건을 계기로 세상에 죽음이 다시 들어오게 되었고, 우리는 우리 곁에 다가오는 죽음을 못 보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이 우화적인 이야기에는 풍부한 메시지가 담겨 있다. 어룬춘 신화가 인간을 만든 원료와 죽음의 관계를 이야기했다면 구룽족 신화는 죽음 자체에 주목한다. 노동은 인간의 숙명이다. 노인은 그 노동이 힘겨워 죽음으로 도망치고 싶었지만 정작 죽음이 문을 열자 죽음을 더 두려워한다. 그는 두려움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노동에서 얻은 정교한 기술로 죽음을 문 안에 가둬버린다. 그 결과, 노인은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하는 딜레마에 빠져 버린다. 

이 딜레마를 벗어나는 길은 의외로 간단하다. 죽음을 세상에 다시 풀어놓기! 풀려난 사신(死神)의 소원은 하나뿐이다. 투명신 되기! 죽음은 투명하기 때문에 인간은 무수한 목전의 죽음을 보지 못한다. 아니, 죽음의 순간에도 죽음을 보지 않으려고 한다. 아니, 외면하고 싶은 마음이 죽음을 투명신으로 만든다. 

이 주제를 더 원시적으로 풀어 놓은 신화가 뉴기니아 동쪽 트로브리안드섬에 있다. 100여년 전에 영국 인류학자 말리노프스키가 조사해 <원시심리학 안의 신화(Myth in Primitive Psychology)>(1926)에 실은 노파와 딸 그리고 손녀딸에 얽힌 이야기다. 

어느 날 노파가 손녀를 데리고 강 하류로 목욕을 하러 갔다. 노파는 손녀가 안 보는 곳에서 허물을 벗고 손녀에게 돌아왔다. 손녀는 허물 벗은 노파를 알아보지 못하고 무서워 꺼지라고 소리쳤다. 노파는 부끄러워하며 허물을 다시 뒤집어쓰고 손녀에게 되돌아왔다. 손녀는 그제야 알아보고 인사를 했다. 그러면서 어떤 소녀가 왔는데, 무서워서 쫓아버렸다고 말한다. 노파는 이렇게 대답한다.

“너는 내가 누군지 알아보려고도 하지 않았어. 좋아, 이제부터 너는 늙게 될 거고 나는 죽게 될 거야.” 

집에 돌아와 식사 준비를 하고 있던 딸에게도 이렇게 말한다.

“내가 목욕을 갔는데, 밀물이 내 허물을 싣고 가버렸단다. 그랬더니 네 딸이 나를 알아보지 못했어. 그 애가 나를 쫓아내더라고. 앞으로 난 허물을 벗지 않을 거야. 이제부터 우린 모두 늙고, 죽게 될 거야.” 

돌로 만들어 죽지 않는다는 신화와 비슷하게 자연 속에서 얻은 상상력이다. 뱀이 허물을 벗으면서 영생한다고 믿었듯이 인류도 허물을 벗으면 회춘할 수 있다고 신화는 말한다. 한데 이 영생의 비밀이 딸한테는 전수되었지만 손녀딸한테는 미처 전수되지 못한 모양이다. 노파는 딸과는 충돌하지 않았지만 손녀하고는 충돌한다. 왜 그럴까? 

노파는 늙음을 상징하고 손녀는 젊음을 상징한다. 식사 준비를 하던 딸이자 엄마는 그 중간에 있다. 노파가 허물을 벗고 손녀의 상태가 되면 세상에서 죽음이 사라진다. 죽음이 사라지면 세상에는 싸움만 남는다. 노파가 벗어놓은 허물을 보았다면 손녀는 할머니를 쫓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죽음은 손녀의 눈에 보이지 않았다. 죽음이 비슈누한테 그렇게 요구하지 않았던가. 구룽족 노인이 죽음을 가둔 문을 열었듯이 노파는 허물을 다시 입을 수밖에 없었다. 소녀는 노파가 되어 죽을 수밖에 없다. 

의 주인공이다." style="background: none 0px 0px repeat scroll transparent; border: none; margin: 0px; outline: none 0px; padding: 0px; vertical-align: top; max-width: 710px;">

프랑스 파리 루브르박물관에 있는 길가메시 부조. 고대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왕인 길가메시는 사후세계에 대한 두려움과 영생에 대한 갈망을 다룬 인류 최초의 서사시 <길가메시 서사시>의 주인공이다. 

죽음의 신화 가운데 가장 오래된 기록은 수메르 서사시 <길가메시>다. 길가메시는 죽음을 향한 여정을 강행한다. 천신만고 끝에 그는 우트나피시팀을 찾아가 영생을 묻는다. 우트나피시팀은 대홍수에서 살아남아 신이 된 인간, 영생을 얻은 인물이다. 한국 무속신화에는 보이지 않는 <신과 함께>의 ‘염마’ 캐릭터는 여기서 왔는지도 모르겠다. 

길가메시는 우트나피시팀을 만나지만 6일 낮 7일 밤을 잠들지 말라는 금기를 지키지 못한다. 바닷속에서 얻은 불로초마저 뱀한테 빼앗긴다. 뱀은 허물을 벗었고 길가메시는 털썩 주저앉아 울 수밖에 없었다. 마침내 길가메시는 죽는다. 그는 영웅이었지만 인간이었다.

‘죽음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 유명한 예일대의 셸리 케이건은 말한다. “죽음은 끝이라는 생각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에 우리가 진정으로 바라고 필요로 하는 가능성으로서 영생을 남겨 두고 있다”고. 이는 죽음에 대한 부적절한 반응이고 비합리적인 태도라는 것이다.

그렇다. 그런데 비합리적인 것으로 가득 찬 신화는 오래전부터 죽음과 대면하고 있었다. 죽음이 실종된 세계야말로 죽음이라는 역설적 진리를 신화는 알고 있었다. 2017년이 죽지 않으면 2018년은 없을 것이다. 

▶필자 조현설 

한국 고전문학·구비문학을 전공했다. 서울대 교수(국문학)로 한국 신화를 포함한 동아시아 신화와 서사문학을 탐구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 <동아시아 건국신화의 역사와 논리>(2004), <우리 신화의 수수께끼>(2006), <마고할미신화 연구>(2013) 등이 있다. 논문으로 ‘해골, 삶과 죽음의 매개자’(2013), ‘천재지변, 그 정치적 욕망과 노모스’(2016) 등이 있다. 



원문보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712272154005&code=210100&s_code=af206#csidxc619b317d430d6e83e3d52cb95c107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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