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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신준환의 꿈꾸는 나무](8)죽은 나무가 수많은 생명 품듯…숲에선 삶과 죽음 ‘흑백’으로 단정 못해
글쓴이 : 시냇물 날짜 : 2017-12-05 (화) 22:11 조회 : 3031

[신준환의 꿈꾸는 나무](8)죽은 나무가 수많은 생명 품듯…숲에선 삶과 죽음 ‘흑백’으로 단정 못해

신준환 | 동양대학교 초빙교수

ㆍ숲을 즐기는 지혜

나무는 과학적으로 보면 지구의 수분과 우주의 햇빛이 서로 당기고 있는 거대한 동아줄이다. 나무는 많은 생명을 키워낸다. 잎의 표면과 속에, 잎자루와 새순의 틈에, 가지 위와 가지 속에, 잎과 가지가 자란 틈새에, 줄기 겉과 속에, 참으로 틈틈이 다양한 생명 공간을 제공한다. 동물도 들어와서 쉴 수 있게 해주기도 하고 때로는 먹이를 떨어뜨려 주기도 한다. 경기 포천 국립수목원을 찾은 시민들이 전나무숲을 거닐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나무는 칸트의 숭고미를 지녔다. 릴케가 나무가 자라는 모습을 보며 ‘오 순수한 상승’이라고 찬양한 것이나 괴테가 가을 숲을 지나다가 ‘이 지상의 것이 아닌 위대함’이라고 감탄한 것은 나무가 하늘을 향한 꿈을 오랜 세월 켜켜이 쌓으면서도 저렇게 높이 솟아 올린 거대함에서 인간의 이성을 놀라게 하는 숭고미를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나무는 이 지상의 것만은 아니다. 나무는 대지에 스며 있는 물의 도움을 받아 우주에서 오는 햇빛을 향한 열망을 펼쳐내고 있는 존재이다.

나무는 천상의 것도 아니고 지상의 것도 아니다. 나무는 우리 민중이 서럽도록 오랫동안 꿈꿔온 천상과 지상의 만남이다. 인류는 오래전부터 나무를 통해 천상의 힘을 받으려 했고 나무를 통해 지상의 뜻을 전하려 했다. 그래서 고대 샤먼은 나무를 타고 천상을 드나들면서 지상의 문제를 해결했다. 그렇다고 나무를 견고한 계단으로 생각해야 할 필요는 없다. 재크와 콩나무 이야기에서는 나무를 밧줄처럼 타고 하늘나라로 간다. 나무와 슬기롭게 소통하기 위해서는 나무를 기둥으로만 보려는 관념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 좋을 것이다. 나무는 과학적으로 보면 지구의 수분과 우주의 햇빛이 서로 당기고 있는 거대한 동아줄이기도 하고, 인문학적으로 보면 지상의 염원과 천상의 기운이 오르내리는 밧줄일 수도 있다. 

이렇게 나무는 지구의 생명에게 우주의 기운을 불어넣어주는 존재이다. 햇빛으로 자라는 나무는 능히 하나의 세계처럼 펼쳐지며 많은 생명을 키워낸다. 잎의 표면과 잎 속에, 잎자루와 새순의 틈에, 가지 위와 가지 속에, 잎과 가지가 자란 틈새에, 줄기 겉과 속에, 참으로 틈틈이 다양한 생명공간을 제공한다. 그리고 이 모든 걸 합쳐 생명의 그늘을 드리우며 거대한 동물이 들어와서 쉴 수 있게 해주기도 하고 때로는 먹이를 떨어뜨려 주기도 한다. 땅속은 더 재미나다. 낙엽이 많은 생물의 먹이와 보금자리가 되어주고, 뿌리는 곰팡이와 공생하며 땅속 사회를 연결할 뿐 아니라 물질을 분비하여 미생물의 마을을 육성시켜준다. 이 모든 것이 태양에서 온 에너지 덕이지만 나무의 생장이 우리가 뚝딱뚝딱 건물을 짓듯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나무의 생장은 물의 분자적 걸음걸이와 햇빛의 양자물리학적 떨림으로 덧칠해가는 과정이다. 비유하자면 만남을 갈구하는 견우와 직녀의 눈물 흔적이 쌓여서 자라는 것이다. 햇빛과 물과 이산화탄소가 만나고, 질소와 인산, 칼륨, 칼슘에 철분, 마그네슘 등 미량 원소까지 수많은 물질들이 이어지고 헤어지는 과정이 집적되어 저 나무가 우리 앞에 서 있는 것이다, 우리가 나무의 나이를 500년, 1000년 하면서, “와 오래되었다”고 감탄하지만 그것은 인간의 기준으로 나무의 생장을 단절해낸 것에 불과하다. 

우리는 일 년이라고 하지만 나무는 영겁의 세월을 자란 것이다. 우리가 일 년 동안 나무의 생장을 지켜본다면 그 자람이 너무 늦어 아마 누구도 그 갑갑함을 이겨낼 수 없을 것이다. 잊어버리고 있다가 다시 보니 쑥쑥 자란 것이다. 일 년 안에 영겁을 끼워 넣는 것은 억지라고 생각한다면 이것은 이 자연을 모두 인간적인 기준으로만 보는 것이다. 

나무껍질에 작은 구멍이 모여 있어 도톰하게 느껴지는 부분을 피목(皮目)이라고 한다. 공기나 수분을 통과시키며 호흡하는 조직이다. 사진은 피목이 잘 발달된 느티나무. 신준환 제공

생명은 모두 자신의 리듬이 있다. 하루살이는 그 짧은 시간에 평생을 보낸다. 수학적으로도 정수 1과 2 사이에는 무한대의 소수가 있다. 그러니 우리가 나뭇잎 하나 뜯을 때도 거룩한 시간을 느낄 필요가 있다. 조선 선조 때 화전놀이를 가서 진달래꽃으로 전을 지져 먹은 백호 임제(1549~1587)는 ‘일년춘색복중전(一年春色腹中傳, 한 해의 고운 봄기운이 배 안에 전해지네)’이라고 노래하며 작고 연약한 꽃잎으로도 넉넉히 1년의 기운을 몸에 담았다. 백호의 시풍이나 조선 유학자들의 세계관을 생각해보면 그들은 일 년 동안 우주의 운행을 담뿍 느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이런 나무들이 모이면 생물 사이의 네트워크는 훨씬 촘촘하고 두꺼워진다. 나무가 모인 것이 숲이지만 신기하게도 숲은 나무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 숲에는 나무 이외에도 많은 생물이 들어와서 생명 네트워크를 더 섬세하게 연결하고 서로 다시 연결하며 다른 생물들에게도 후덕한 층을 쌓아간다. 그래서 나무도 단순히 줄기로만 서 있는 것이 아니라 생물 사이의 연결통로가 되기도 한다. 나무를 타고 다니는 생물, 나무를 고개 삼아 의지하는 생물, 나무에 젖줄을 달고 사는 생물, 나뭇가지 사이로 쏘다니는 생물. 그래서 숲에서 똑바로 서서 가지 말고, 기어가보거나 누워보거나 나무 위로 올라가 가지 사이로 다녀보면 완전히 다른 세계를 경험하게 된다. 숲은 우리의 선입관처럼 나무줄기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많은 길로 이루어져 있다. 

더 신비로운 것은 숲은 나무가 이룬 세계이지만 우리가 숲을 느끼는 것은 나무 자체가 아니라 나무 사이의 빈 공간이라는 점이다. 빈 공간이 있어 우리 마음이 숲과 통할 뿐 아니라 빈 공간이 있어 새들이 날고 많은 생물이 사회를 이루어 탄력을 유지하는 다채로운 생태계가 되는 것이다. 이런 공간도 일률적이면 재미가 덜하다. 좁은 것 같다가 넓은 곳이 나오고 넓은 공터 가에는 덤불숲이 우거진다. 숲은 어디를 통해 나에게 느껴지는가. 숲도 공간을 통해 숨을 쉬며 우리와 호흡을 같이하는 것이다. 이럴 때 나를 통해 느껴지는 숲은 어디에 있는가? 

나를 의식하면 숲이 사라지고 숲을 의식하면 내가 사라진다. 나와 숲 사이에는 어떤 세계가 있는가? 숲에 들면 흔히 눈이 커진다. 숲속에는 햇빛이 줄어드니 동공이 확장되기도 하겠지만 평소에 볼 수 없었던 색다른 것들이 계속 나타나니 눈이 휘둥그레지는 것이 당연할 것이다. 그래도 적당히 보고 나면 눈을 감고 쉴 줄 아는 것이 좋다. 눈을 감으면 시각이 차단되는 것 같지만 오히려 시각에 의해 차단되었던 다른 감각이 살아나며 오감이 연결되어 나를 통해 숲으로 가는 길을 느낄 수 있다. 그래서 나와 숲 사이에는 무한한 세계가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경험을 하다보면 숲의 한적한 골짜기에서도 우주를 느낄 수 있다. 인간의 고정관념으로는 지구를 떠나야 우주를 느낄 수 있을 것 같지만 우주는 속속들이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어디서든 느낄 수 있다. 내 몸에 있는 철분은 초신성의 산물이고 지구는 우주의 산물이 아닌가? 굳이 시인의 노래를 끌어들이지 않아도 작은 꽃 하나에서도 우주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삶과 죽음도 그렇게 다르지 않다. 죽어 썩어가는 나무가 많은 생물을 빨아들이는 블랙홀처럼 보인다. 나무가 죽고 난 후 새로운 우주가 되어 많은 생명을 부양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듯 잘 살아왔던 나무는 죽어서도 많은 생물을 부양한다. 그렇다. 죽음이 문제가 아니라 잘 살아내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잎이 진 숲에서 밤을 지내보자. 해가 지고 나니 별들이 보인다. 우리는 어둠을 만나야 영롱한 별을 맞이할 수 있다. 공자와 맹자,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칸트와 톨스토이, 그리고 우리 민족의 원효까지 모두 오랜 세월 동안 인정을 받기는커녕 고통 속에 헤매거나 아픈 몸을 이끌고 위대한 사색을 펼쳐냈다. 사회의 권력자들은 빛과 어둠을 나누는 흑백논리로 맞고 틀린 것을 선명하게 나누는 것을 좋아하지만 숲에서는 더 큰 지혜를 배울 수 있다. 생태계를 보전하기 위해서는 빛을 받아 살고 있는 나무도 중요하지만 꺼멓게 죽어버린 나무가 더 중요할 수 있다.

나무껍질은 죽은 세포가 집적되어 만들어진다. 나무껍질에 있는 무늬를 보며 나무마다 각기 다른 숨결을 느낀다. 사진은 껍질의 무늬가 선명한 노각나무. 신준환 제공

나무는 죽어서도 많은 생물의 먹이와 보금자리가 된다. 죽은 나무에 살고 있는 생물은 대부분 살아 있는 나무에서는 살 수 없다. 

우리에게는 살아 있는 나무들이 빛으로 보이고 죽은 나무는 어둠으로 보이겠지만 다른 많은 생물들에게는 반대로 보일 수 있다. 인간이 숲을 보호한다고 죽은 나무를 치워버리면 이런 생물들은 엄청나게 넓은 범위를 차지하고 있는 산 나무들의 장애를 넘어 다시 죽은 나무를 찾아가야 한다. 어떤 생물들에게는 죽은 나무를 잃는 것이 인류가 지구를 잃고 다른 행성을 찾아가는 것보다 더 큰 재앙일 수도 있다. 

숲이란 생명 네트워크에서 우리가 소홀하게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아니 오히려 우리의 생각의 틀을 바꿀 필요가 있다. 이제 우주를 더 잘 이해하게 되면서 많은 우주과학자들은 암흑물질과 암흑에너지가 우주의 95~96%를 차지하고 있다고 추정한다. 하지만 여기에도 흑백논리가 작용한다. 암흑물질은 빛은 물론 전파·적외선·자외선·X선·감마선 등과 같은 전자기파로도 관측되지 않는 물질을 지칭하므로 빛이 없는 물질이 아니라 빛으로는 알 수 없는 물질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에 흑백논리로 암흑물질(dark matter)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우리가 생명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주나 숲을 보는 데 있어서 흑백으로 단정할 수 없는 세계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힘을 길러야 할 것이다. 

죽은 나무에 많은 생명이 깃들이는 것을 보면 숲과 함께 호흡하고 있는 인간의 죽음도 흑백논리로는 이해하기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가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탄생과 죽음은 그저 생명과정의 깜박이는 계기일 뿐 생태계는 탄생과 죽음으로 단절되지 않는다. 나무는 죽으면 자신이 살았던 숲을 오랫동안(거의 살았던 만큼) 더 풍요롭게 만든다. 그런데 사람은 왜 죽으면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다고 슬퍼할까? 과연 죽은 사람은 어디로 간 것일까? 오히려 나에게로 들어온 것이 아닌가?

톨스토이가 <참회록>에서 고백하고 있듯이 사람이 죽고 나서, 살아 있을 때보다 훨씬 더 큰 영향을 주는 경우가 많다. 물론 사람이 죽으면 슬픈 것은 당연하겠지만 너무 슬퍼하며 자신의 건강까지 해치는 것은 죽은 자에 대한 예의도 아니다. 우리는 죽은 자를 보낸 것이 아니라 더 큰 감화를 받고 있는 것이다. 사실은 살아 있는 나무에도 산 것만 있는 것이 아니다. 나무는 흥미롭게도 죽은 조직이 산 조직을 지탱해주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나무의 심재(心材)는 죽은 조직으로 온갖 물질을 축적하여 강도와 굳기를 더함으로서 나무를 지탱해준다. 그래서 나무를 잘라보면 심재에서는 수액이 나오지 않는다. 심재의 바깥에 있는 변재(邊材)도 수액은 흐르지만 세포는 살아 있지 않고 통도조직의 기능만 발휘하고 있다. 자신의 삶은 끝냈으나 다른 조직의 삶을 위하여 수액을 옮겨주고, 자신은 죽었으나 다른 조직을 하늘 높이 올리고 버텨주기 위해 강도와 굳기를 더하는 것이 나무이다.

나무의 수피(樹皮)도 재미있다. 수피란 나무껍질이 두껍게 쌓인 조직인데 이것도 살아 있는 것이 아니다. 원래 형성층에서 만들어진 물관부는 해가 거듭되며 목재가 되고 체관부는 수피가 되는데 점점 두꺼워지지만 죽은 세포가 집적되어 있는 것이다. 나무껍질에 작은 구멍이 모여 있어 도톰하게 느껴지는 부분이 있다. 눈처럼 보인다고 피목(皮目)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공기나 수분을 통과시키며 호흡을 하는 조직이다. 이렇듯 나무는 죽은 자들을 통해 호흡을 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인간 사회도 사실은 죽은 자들이 지탱해주고 있는 것이 아닌가? 오랜 핍박과 엄청난 고통 속에도 인간의 이성을 갈고 닦으며 존엄성을 빛내고 이어준 고인들이 없었으면 우리 사회가 이만큼 지탱할 수 없었을 것이다. 강도를 보태는 나무의 심재도, 수액을 유통시키는 변재도, 호흡기능을 하고 있는 수피도 세포만 보면 생리학적으로 죽은 것이지만 물리학적인 의미에서는 살아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나무는 삶과 죽음을 엄밀하게 구분해야 직성이 풀리는 우리 인간들을 한심하게 보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필자는 나무껍질에 있는 무늬를 보며 나무의 숨결을 느낀다. 노각나무의 숨결이 다르고 자작나무의 숨결이 다르다. 수피들도 나에게는 다채롭게 살아 있는 것이다. 고인들도 어디로 간 것이 아니라 우리 속에 살아 있으며 우리의 마음을 키워주고 삶의 무늬를 바로잡아준다. 이렇듯 숲을 즐기는 지혜를 얻고 나면 숲은 우리 삶 깊은 곳의 어둠을 거두어준다.

▶필자 신준환 

전통 생태 지식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산림생태, 생물다양성 보전 등을 연구하고 있다. <다시, 나무를 보다>, 어린이 그림책 <나무는 언제나 좋아> 등을 출간했다. 국립수목원장을 지냈다. 동양대학교 초빙교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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